한글마당 13















韓國漢城華僑中學

韓語韓文敎學硏究會


목 차

<시>

꽃잎 中1-3 高華鋒 1

먹구름 中1-1 王時明 2

반장 中1-1 雷克環 2

봄바람 中1-3 姜廣明 中1-3 劉貞華 3

봄소식 中1-2 焉泓卿 中1-2 鄒美慧 中1-3 賀常煢 5

새싹 中1-2 溫德進 7

우리가 사는 이 세상 中1-1 孔慶世 8

<시조>

봄 高1-1 劉靑怡 8

폭풍우 속 高1-1 裵敬華 9

밤 高1-1 陳玉珠 9

봄 高1-4 李賢華 9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랑 高1-4 王聖迪 10

친구 高1-4 孫茂源 10

수학 지옥 高1-3 陳芳疴 10

시험 高1-3 宋雲賢 11

나의 강아지 高1-3 孫粝容 11

<계절 이야기>

겨울 中2-3 鄒積仁 12

봄 高2-4 李在羲 12

봄비 中3-3 牟德芬 13

<사랑과 행복의 이야기>

그리움 中3-3 牟德芬 14

나나와의 이별 中2-2 陳生喜 14

아버지 中3-3 顧大良 15

엄마 中3-3 柳欣雅 16

장녀 高2-4 杜京愛 16

<추억 이야기>

겨울방학에 생긴 일 高1-1 無名氏 高1-4 吳京燕 高1-1 劉靑怡 18

高1-4 王鴻德 高1-4 張家榮 19

겨울방학 이야기 中2-1 周香麗 24

방학 때 느꼈던 일 中3-3 孫孝民 24

방학 때 생긴 일 中3-3 谷美英 25

방학 때 있었던 일 高1-1 譚秋錦 中2-1 王姸楆 中2-1 王惠里 25

中2-2 秏嘉鴻 中2-3 李秀珍 中2-3 臧珍瑩 28

봄 소풍 高3-3 曲仁德 高2-1 王粳貞 高2-1 賀昭允 30

사촌들과의 겨울 방학 高1-3 孫粝容 33

<우리들의 생활 이야기>

"꿈" 속에서 中2-2 錢錦汶 35

나의 학교 생활 高2-2 金梨智 35

낭떠러지의 끝 中3-3 牟德分 36

미래에도 대학 간판이 필요할까??? 高2-2 李知洪 37

비상구 中3-3 高慧丞 38

시골에 사는 사람들 中3-3 顧大良 39

아름다운 세상 高2-4 姜仁元 39

약속 高1-3 鄒美娜 41

어진 친구와 사귀어라 中1-1 孔慶世 41

희망 中3-3 鄒智姸 42

<독서 감상문>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高3-4 任慶麗 43

<나는 책이 참 좋다>를 읽고 中3-2 徐吉全 47

<나보다 더 사랑하는 그대에게>를 읽고 中3-1 王煢煢 47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고 中3-1 谷德英 48

<람세스>를 읽고 中3-1 孫慧君 49

<운수 좋은 날>을 읽고 中3-3 張君年 49


<논설문>

사설 <산불 재해민 구호에 총력을>를 읽고 高3-4 任慶麗 51

사설 <생활 주변에 만연된 마약>을 읽고 高3-4 任慶麗 52

사설 <'씨랜드 참사'에 다시 분노한다>를 읽고 高3-4 呂明美 53

<특집 - 문예반 토론회>

사형 제도에 대한 찬반 토론 한글문예반 54

<특집 - 박물관 관람보고>

국립 중앙박물관을 관람하고 高 3-2 59

<과학 이야기>

놀라운 물의 속성 87

<역사 이야기>

민속놀이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89

<세상 이야기>

알아두면 편리한 외국인 상식 92

편집자의 변 94












<시>

꽃잎

中 1-3 高 華 鋒

꽃이 매우 아름답네

바람이 불면

이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꽃잎을 떨치네

꽃잎이 떨어지면

그 잎들은

땅에 떨어지고

그 꽃은

꽃잎 없는 꽃이 된다네

꽃에 꽃잎이 없으면

사람이

머리카락 없는 모습과 같고

그래서 그 꽃잎은

꽃의 멋이라 할 수 있네










먹구름

中 1-1 王 時 明

먹구름은 둥둥 떠다니면서 가는 데마다

사람들은 아주 싫어합니다.

구름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

사람들은 먹구름이 얘기하려고 할 때는

우산을 폅니다.

그래서 먹구름은 매일 우는 거죠.

먹구름은 집도 없고

우리처럼 관심을 가져주는 부모도 없습니다.

아주 작은 먹구름은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고 울면서

자기 생명을 다 합니다.

아주 큰 먹구름은 며칠 동안 자기 얘기를 들어달라고

울부짖죠.

먹구름은 며칠 동안

아주 기분이 안 좋은 얼굴로 다닙니다.

제가 대신 말하겠습니다.

먹구름을 좀 좋아해 주세요.

반장

中 1-1 雷 克 環

우리 반의 반장은

아주 쑥스러움을 많이 탄다.

하지만 마음이 순수하고

공부도 잘 한다.

원래 반장은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워야지

반장이 아닌가?

한데 반이 시끄러울 때

반장이 지켜야 하는데,

못 지키면 여학생들은

이 바보, 반장은 반장다워야지!

어떻게 반을 안 지킬 수가 있어?

반을 말아먹을 생각이야 하고

큰소리를 친다.

도대체 우리 반의 반장은

왜 이런가?

봄바람

中 1-3 姜 廣 明

봄바람이

내 몸에 스치면

왠지

내 몸은 편안해지고

봄바람이

내 몸에 맞으면

왠지

내 몸은 흐뭇하네

그 바람

딴 바람도 아닌

그 봄바람

내 몸에 스치면

왠지

내 몸은 편히 잠이 드네.

봄바람

中 1-3 劉 貞 華

봄바람이 불면

봄이라는 걸 알게 되고

봄바람이 불면

따뜻하고 시원하기도 하고

봄바람이 불면

꽃들의 향이 느껴지네

봄바람이 불면

우리는 사랑하게 되고

봄바람이 불면

우리의 가슴은 설레고

봄바람이 불면

우리는 행복해진다.




봄소식

中 1-2 焉 泓 卿

어느덧 추운 겨울이 지나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봄이 왔습니다.

은은한 꽃향기는 바람을 따라

세상을 향긋하게 변화시키고

귀여운 새싹들은

세상을 푸르게 물들이지요

언제나 바쁜 꿀벌들은

세상에 활기를 띄우고

나는 가장 밝은 계절

봄을 안고

공부나 열심히 하렵니다.

봄소식

中 1-2 鄒 美 慧

봄이 오면 바람이

알려 줍니다.

봄바람은

춥지도 덥지도 않지요.

봄이 오면 새싹들이

알려 줍니다.

새싹들은 아름답게

자라지요.

그러면서 봄의 소식들을

알려 줍니다.

봄소식

中 1-3 賀 常 煢

따스한 봄 햇살이

대지를 비춥니다.

한들한들 봄바람은

향기로운 꽃내음을 가지고

산과 들을 여행하며

땅속에 숨어있던 새싹들과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을 깨워 줍니다.

그리고

차가운 겨울 바람으로

꽁꽁 얼어있던

우리들 마음속에도

봄소식을 전해 줍니다.

새싹

中 1-2 溫 德 進

새싹 새싹 커 가는 새싹아

너는 언제 훌륭하게 크니

새싹 새싹 커 가는 새싹아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큰 나무가 되고 싶니?

예쁜 꽃이 되고 싶니?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니?

나무는 죽어서 새싹을 남기고

꽃은 벌을 유인해 새싹을 뿌리고

사람은 훌륭하게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

그러나 나무와 꽃 그리고 사람의 새싹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새싹 새싹 새싹아

빨리 빨리 커서

훌륭하게 되거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

中 1-1 孔 慶 世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누구의 세상일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누구의 손길일까?

들어봐 들리지 않니?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

가만히 역사를 만들어 온 숨소리 느껴지지 않니?

가만히 귀 기울여봐 너와 나 걸어온 이 세상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야할 이 세상.




<시조>

봄

高 1-1 劉 靑 怡

겨울이 지나가고 따스한 봄이 왔다

내리쬐는 햇살아래 나의 눈은 감겨지고

졸다가 깨어나 보니 선생님이 노려보네




폭풍우 속

高 1-1 裵 敬 華

장대비 내려치고 파도가 몰려오고

폭우 속 한 고깃배 폭풍에 요동치네

고깃배 몸부림치며 만선의 꿈 이뤄가네



밤

高 1-1 陳 玉 珠

어두운 하늘아래 밤길 속을 지나가며

아쉬운 이별이 그 길가에 있으리야

가로등 불빛만 남아 걷는 길을 비추네



봄

高 1-4 李 賢 華

봄이 오면 꽃들은 고개 들어 인사하네

따스한 봄햇살이 온 세상을 감싸고

시원한 바람이 불면 내 마음도 날아가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랑

高 1-4 王 聖 迪

세상에 사람들은 사랑하고 헤어지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모른다

난 나의 단 하나뿐인 사랑을 갖고싶다



친구

高 1-4 孫 茂 源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친구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나 항상 너의 곁에

우리의 아름다운 우정 영원히 간직하리



수학 지옥

高 1-3 陳 芳 疴

나는야 수학이 제일로 싫어요

코싸인 탄젠트 이런 게 젤 싫고요

수학은 과연 누구가 발명을 하신 걸까


시험

高 1-3 宋 雲 賢

시험날이 와 버렸네 공부를 해야하나

공부를 하려하면 눈썹이 무겁네

결국에 시험날 되면 얼렁뚱땅 지나지



나의 강아지

高 1-3 孫 粝 容

말똥말똥 검은 눈 복실복실 하얀 털

나를 보면 꼬리 흔들고 반가워 해주는

저 멀리 떠나 가버린 나의 강아지

때론 나한테 갑자기 성을 내고

또다시 순해지는 바보 같은 강아지지만

저 멀리 가버린 강아지가 정말로 보고 싶다









<계절 이야기>

겨울

中 2-3 鄒 積 仁

일년 중에 마지막 계절을 우리는 겨울이라고 한다. 즉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겨울이 되면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린다. 눈, 찬바람, 추위, 빙판길, 고드름てててててて. '衣'에서는 빵모자, 장갑, 마스크, 내복이, '食'에서는 군고구마, 호빵, 군밤이, '住'에서는 난로, 따뜻한 방 등이 생각난다. 어느 계절이든 그 나름대로 자기만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또 가을대로 서로 다른 향과 맛을 가지고 있듯이, 각 계절마다 자기의 순서와 질서를 유지하면서 서로 연결하여 돌고 돌면서 흘러간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며,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기에 겨울이 와서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리고 다음 계절이 찾아온다.

내가 보는 이번 겨울이 지난 겨울과 다른 느낌을 가지는 것은, 아마 내가 조금은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봄

高 2-4 李 在 羲

추운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따뜻하고 포근한 봄이 왔다. 일년의 시작인 봄은, 만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계절이다.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도 하나 둘씩 잠에서 깨어나고, 또 겨울 동안 제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한 아름다운 꽃들도 서서히 고개를 들고 봄을 맞을 준비를 한다. 이렇게 모든 시작을 알리는 봄은 우리에게 항상 포근한 느낌을 준다.

겨울 동안 불어오던 싸늘하고 차가운 바람이 봄이 되면서 포근해지고, 많은 사람들의 움추렸던 어깨도 다시 활력을 찾은 듯 자신 있게 쭉 펴지고, 또한 "시작"이라는 느낌을 주어서인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봄을 맞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듯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런 봄이 오면, 아마 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따뜻하고 인자하신 어머님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봄이 되면 특히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꽃"일 것이다. 겨울과 달리 상큼한 꽃내음이 나는 봄에는 개나리, 진달래, 민들레 등등 참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꽃들이 많이 핀다. 이런 아기자기한 꽃들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상쾌함과 따스함에 아마도 사람들은 더욱 봄을 기다리는 것 같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겨울 동안 쌓였던 답답함을 봄의 상쾌함으로 씻어 내리기에 봄을 좋아한다.

이렇듯 봄은 우리에게 항상 따뜻함과 행복함을 전해준다. 이런 봄이 다른 계절보다 더 아름다운 이유는, 항상 우리들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는 까닭이 아닐까? 나는 소망한다, 앞으로도 봄이 전해주는 따스함과 포근함이 영원하기를てててててて. 그리고 언제나 지금과 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기를てててててて.


봄비

中 3-3 牟 德 芬

봄비는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온 세상을 적신다.

봄비가 지나간 자리엔 생기가 돈다. 비에 젖은 흙에서 풍기는 향기는 잠시나마 세상에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아직은 차가운 봄바람이 두 뺨을 스칠 땐 조금은 썰렁하지만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꽃잎 위에 맺혀 있는 빗방울을 보면, 이미 더러워진 마음을 그 빗방울처럼 투명하고 말게 씻어주는 듯 하다.

봄비는 그렇게 상쾌하고 유쾌하다. 포근하고 부드럽고 아름답다.







<사랑과 행복의 이야기>

그리움

中 3-3 牟 德 芬

정월 보름날엔 냉이만두를 먹었다. 그리고 엄마와 난 달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 어두워진 하늘에 달이 있었다. 그 달은 너무나 밝고 또 정교했다.

엄만 달 속에 외할머니의 얼굴, 그 자상한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아주 오래 전에 아주아주 오래 전에 암을 앓으셨다. 그리고 엄만 학교를 다니면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리곤 엄마가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외할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눈도 감지 못한 채てててててて.

그건 그리움이었다. 돌아오지 못할 것에 대한 그리움てててててて. 연필로 쓴 글씨를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그 형태는 이미 사라졌지만 남아 있는 그 자국てててててて. 그 자국이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나 보다.


나나와의 이별

中 2-2 陳 生 喜

작년 겨울, 우리 학교 정문에서는 토끼, 햄스터 그리고 뽑기를 어느 두 부부가 팔고 계셨다. 그날 저녁에는 햄스터가 너무도 사고 싶어 공부가 안 되었다. 그 다음날 난 학교 공부도 안 되고 빨리 학교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서 그냥 부모님 허락 없이 햄스터를 샀다.

집에 도착한 후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엄마 아빠께서는 내가 햄스터 산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건 동생이 이미 다 말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반대를 했지만 아빠는 찬성을 했다. 그날 16일을 햄스터의 생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름을 나나라고 지었다. 먼저 나나를 박스에 키우다가 나나가 너무도 구멍을 잘 내서 큰 김치통 6호 사이즈에 집을 만들고, 며칠 후 아빠가 톱밥과 먹이 그리고 놀이기구도 사 주셨다.

그리고 얼마 후 방학이 오자 시골에 계시는 할머니와 이모가 놀러 오라고 하셨다. 우리 식구 모두랑 나나도 같이 기차를 타고 출발을 했다. 도착한 후 엄마 아빠는 이틀 있다가 서울로 가셨고, 나랑 동생은 남기로 하였다. 거의 한 달이 지난 후 나나의 집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며칠 후 엄마 아빠께서 우릴 데리러 오셨다. 우리 식구끼리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나나를 집에서 키우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나나를 어떻게 해야 할까하고 생각을 또 했다. 그래서 아빠는 나나를 산에다가 풀어주자고 하셨다. 그런데 집안에서 따뜻하고 안전하게 지내왔던 나나가 밖에서는 도둑고양이 그리고 날씨가 추워서 꽁꽁 얼어죽으면 안돼서 그냥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예약된 차표가 시간이 다 되어가자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이모는 농사일 때문에 나나를 못 키우시고, 떠날 시간이 오자 우린 모두 차에 타고 기차역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모르고 나나를 그냥 놓고 온 것이다. 그래서 우린 그만 헤어졌다.

한 생명이 있는 동물이 자기가 태어난 데에서 잘 살고 있는데 괜히 나 때문에 나나가 버려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한 동물을 살 땐 꼭 잘 생각하고 사야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엔 어떤 동물을 사야 되는지 꼭 생각하고 살 거다!


아버지

中 3-3 顧 大 良

내가 방학 때 인상 깊게 느낀 것은 우리 아버지다. 내가 아는 우리 아버지는 아주 엄격하고 부드러운 면이 없었다. 내가 어릴 때도 아버지에게 심한 벌도 받고, 나를 아주 엄격하게 대하셨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버지와 얘기를 자주 안 하고 그런다. 우리 어머니는 이런 말을 나에게 하셨다. "니네 아빠는 무뚝뚝해."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てててててて.

2월 29일. 우리 어머니의 마흔 다섯 번째 생신이다. 우린 모두 어머니에게 선물 줄 준비를 하는데, 아버지는 아무 반응도 없다. 그런데 밤이 되자 아버지가 약간 어색한 미소로 엄마에게 다가와 "생일 축하한다!" 그러고는 마흔 다섯 송이 장미꽃을 엄마에게 주었다.

나는 그것을 보아 우리 아버지도 부드러움이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엄마

中 3-3 柳 欣 雅

방학 기간 중에 전 몸이 몹시 안 좋았습니다. 겨울 독감이 유행일 때 저도 어김없이 독감에 걸렸던 것이죠. 뭐 처음에는 콧물 기침 정도로 시작한 약한 감기가 나중엔 힘이 없어 그 즐거운 방학 일 주일을 그냥 침대에 누워지냈습니다.

독감은 아주 무서운 병이지요. 하지만 전 아팠던 그 일 주일 동안 마음 속으로 무척 행복하고 뿌듯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파 침대에 누워있을 때면 엄만 어김없이 내 옆에 앉아 제 손을 잡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십니다. 그래서 엄만 며칠 잠도 못 주무셨어요.

요즘 불경기라 장사도 잘 안되고 많이 속상해 하세요. 하지만 우리 앞에선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시지만, 가게에서 돌아와서 피곤해 그냥 잠드신 엄마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내 마음엔 참 미안하단 생각뿐이 안 듭니다.

저에게 만약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다운 사람인지 고르라고 한다면 전 주저 않고 "엄마"라고 큰 소리로 외칠 것입니다!

엄마 저 신야 노력해서 효도할 게요.


장녀

高 2-4 杜 京 愛

우리 집에는 엄마와 남동생 둘, 그리고 내가 살고 있다. 나는 집에 하나밖에 없는 딸이고, 장녀이다. 장녀에 대한 부담감을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느꼈다. 왜냐하면 그 때 아빠를 잃은 엄마의 짐을 함께 해야 했기 때문에てててててて.

처음엔 그 당시 상황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모든 것들이 혼란스러웠고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과연 내가 엄마만큼 힘이 들었을까? 절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철이 없던 나는 엄마 입장을 생각지도 않고 그저 나만 힘들다고 투정만 부렸는데, 어느덧 삼 년이 지났다. 지난 삼 년 동안 우리 집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리 집은 서울로 이사왔고, 엄마는 장사를 시작하셨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시고 우리들만을 위해서 사시겠다는 엄마의 말씀에 나는 조금은 철이 들었나 보다.

늘 바쁘신 엄마, 그래서 늘 집을 비우시는 엄마 대신 나는 장녀 노릇을 해야했다. 동생들을 챙기고 밥하고 빨래, 설거지, 청소 등은 어느덧 내 몫이 되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인데てててててて, 나는 가끔씩 언니나 오빠라도 있었으면 하고, 또 때로는 왜 내가 이렇게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내 자신에게 던져 보기도 한다. 그리고 또 가끔은 괜한 남동생한테 화도 내고, 이런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기도 하다.

사춘기 때 나는 엄마가 나를 대하시는 것과 남동생들을 대하시는 걸 자주 혼자서 비교했다. '딸이니까', '장녀니까' 나만 많은 것을 떠맡아야 한다는 그 말이 싫었다. 남동생들은 애지중지 해 주시면서 왜 난 신데렐라나 콩쥐처럼 혼자서 집안 일을 떠맡아야 하느냐며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장녀니까'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을 열심히 하고 엄마를 많이 도울 생각이다. 왜냐하면 지난 삼 년 사이에 엄마는 몸도 고생하셨지만 마음 고생도 아주 심하셨다. 그래서 건강도 이제는 그리 좋지 않으시다. 엄마의 힘든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 장녀니까 해야 할 일들보다 엄마니까 해야 할 일들이 몇 천 배 만 배난 힘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장녀니까 앞으로 모든 일에 충실해서 동생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며, 그리고 엄마가 힘들 때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장녀가 될 것이다.










<추억 이야기>

겨울 방학에 생긴 일

高 1-1 無 名 氏

이번 겨울방학중 제일 생각나는 일은 영어연수를 갔다왔던 것이다. 1월 5일부터 2월 1까지 거의 한 달이란 기간동안 포천에 있는 대진대학교에서 생활하면서 공부도 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처음 연수를 간다고 생각했을 땐 기대도 많이 했지만 아는 친구도 없고 아빠, 엄마와 처음으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지내는 거라 많이 무섭고 떨렸다. 거기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만난 친구는 내 룸메이트였다. 그 친구는 부산에서 온 친구인데 보기에 너무 착하고 순진해 보여 너무 좋았고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반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을 볼 수 있었다. 우리 반 선생님은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온 선생님인데 한국에 처음으로 오는 거라 처음엔 의사소통도 잘 안되고 힘들었지만 선생님이 많이 노력한 덕에 금방 친해지고 나중엔 의사소통도 잘 되고 좋았다. 반 친구들은 다 착해서 반 분위기도 너무 좋았다. 그래도 처음 며칠은 그 생활에 적응이 잘 안돼서 너무 힘들고 울기도 했고 친구들과 모이면 집에 가고싶다는 이야기밖에 없었다. 아빠, 엄마도 너무 보고싶고.... 그렇지만 점점 그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그 생활이 너무 재미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재미있었던 일도 많고 힘들었던 일도 많았다. 아침운동을 하기 위해 6:30에 일어나는 것도 잠이 많은 나에게 너무 힘들었고, 아침 9시부터 저녁 10:30까지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긴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교실에서 보내기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그 반면 밤마다 점호시간 후 선생님들 몰래 몇몇 친구들과 모여 군것질을 하며 많은 이야기도 하고 외국선생님들이 많아 자기 나라에 여러 가지 재미있는 풍습도 이야기하고 토요일 날 운동회가 있었는데 운동회에는 피구경기와 발야구경기가 있었다. 날씨는 많이 추웠지만 너무 재미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되는 것도 많다. 선생님 말씀도 잘 안 들었고, 잠이 모자라 수업시간에 많이 자기도 했고, 공부도 열심히 안 했고, 선생님한테 너무 죄송하고 후회된다. 그래도 처음으로 이렇게 아빠, 엄마와 떨어져 몇백 명이 되는 친구들과 같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영어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또 하나의 좋은 추억이 생겼다.

마지막 퇴소식 날, 퇴소식을 끝내고 막상 친구들과 헤어지려니까 눈물이 나왔다. 1달 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는지 친구들도 울고 선생님들도 많이 울었다. 그래도 아직까지 몇몇 친구들과 선생님들하고는 연락도 하고 만나기도 한다. 이번 방학은 재미있고 알차게 보낸 것 같아 너무 좋았다. 이런 기회가 또 있다면 가서 공부도 더욱 더 열심히 하고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

겨울 방학에 생긴 일

高 1-4 吳 京 燕

1월 28일.... 난 이날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우리 오빠가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작년 가을 오빠는 소리 없이 떠났다. 난 그날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에 갔고 그 때문에 오빠의 마지막(?) 뒷모습은 보지 못했다. 굉장히 실망했었다. 그런데 오늘 그 오빠가 돌아오는 것이다.

나와 엄마는 일찌감치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저기서 오빠가 짐을 끌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난 처음에 오빠를 못 알아 볼 뻔했다. 머리도 기르고 안경도 안 썼고 오빠 같지가 않았다.

오빠는 날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야! 넌 어찌 그대로냐?", "내가 멀........"내 말이 끝나자 오빠는 엄마에게로 갔다. 오빠가 엄마랑 얘기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오빠의 여자친구 얘기였다. 집에 도착한 후 난 오빠한테 여자친구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오빠는 아주 자랑스럽게(?) 사진을 내 놓으며 "이쁘지?"하고 묻는 것이었다. "피, 뭐가 이쁘냐?" 내가 이렇게 말하자 오빠는 "내가 이쁘다면 이쁜거야!"하며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참 내....)

며칠 뒤 오빠는 고모네서 할머니를 모셔왔다. 할머니는 오빠만 보면 웃으시고 나만 보면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다. (핏! 편애해...) 그래서 솔직히 난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는 게 싫다. 또 며칠 뒤 설날 전야였다. 나와 오빠 그리고 사촌 동생들과 만두도 먹고 재미있게 놀았다. 게다가 올해는 새벽에 세배를 하고 새뱃돈을 받았다(^^). 아빠와 할머니는 밤새 한 판(?) 붙으셨고 엄마와 작은 엄마는 얘기를 나누셨고 나와 동생들은 컴퓨터게임을 했다. 오랜만에 즐겁게 밤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는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농구를 하러갔다. 몇 시간 뒤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다리를 다쳐서 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나 너무 놀라 일단 병원에 갔다. 나중에 의사가 "인대를 많이 다쳤습니다. 나중에 수술을 해야겠지만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충격이었다. 치료를 거의 마치고 집에 갈 때는 오빠의 오른쪽 다리 전체에 붕대를 감고 게다가 목발의 도움을 얻어야만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집에 도착한 후 엄마와 아빠는 몹시 걱정하셨다. 당장 이번 주 일요일에 떠난다는데.... 휴학할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빠의 주장으로 일단 대만에 있는 台大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일요일 난 오빠가 떠나는 공항에 가고 싶었지만 엄마가 못 가게 해서 할 수 없이 집에 있었다.

그날 밤 오빠에게서 잘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그래도 부모님은 많이 걱정하셨다. 부디 오빠가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난 밤새 기도했다.

겨울 방학에 생긴 일

高 1-1 劉 靑 怡

긴 겨울방학기간에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방학하고 몇 주 정도 지나 우린 컴퓨터를 새로 하나 구입했다. 예전에 샀던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이번에 새로 구입한 것이다. 컴퓨터가 오는 날 우린 컴퓨터를 넣을 자리를 정리하고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컴퓨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도 컴퓨터는 오지 않고 전화벨만 울렸다. 얘기인즉 우리가 요구한 프로그램이 없어서 다른 상점에서 구입한 후 입력하려면 내일 배달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어쩌랴.. 좋은 프로그램을 위해 하루를 참기로 했다.

오늘은 아빠 따라 방송국가는 날, 처음으로 아빠와 동행을 하니 마음이 들떴다. 아빠의 촬영이 시작되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숨을 죽여 지켜 보았다. 아 드디어 생방송이 끝났다. PD선생님과 작가언니의 칭찬에 왠지 모르게 나 또한 즐거웠다. 방송국에 아빠 팬레터가 계속 우편으로 배달된다 하였다. 나오는 길에 김원희 언니와 손창민 오빠를 보았다. 그들은 '3일간의 사랑'을 녹화하러 왔다고 했다.

참 웃기는 일이 있었다. 아빠 회사의 동료가 놀러오셨다. 나와 내 동생은 한참 재미있게 DDR을 하고 있었다. 실력이 부족하여 점수가 많이 나지 않았다. 아빠친구가 이 점수를 보고 이 점수를 깨겠다고 큰소리치며 DDR판에 올라갔다. 상상을 해보자. 그 나이에 그 몸매 안 봐도 뻔하다. 결과는 음악 따로, 몸 따로, 팔 따로, 다리 따로 완전히 코미디 한마당이었다. 덕분에 일주일의 웃음을 한번에 다 웃은 느낌이었다.

오늘은 엄마 따라 시장에 갔다. 참 이해가 안 갔다. 반찬 살 때 값을 깎는 모습, 야채 살 때 덤을 달래는 모습은 보기에 어색했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우리 엄마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 아줌마가 되었나보다. 참으로 슬펐다. 엄마 왈 "너희가 클수록 이 엄마는 늙을 수밖에 없단다."

이번 방학에 많은 일이 있었다. 그 많은 것을 다 열거하기엔 지면이 모자라다. 그래서 특히 기억날만한 일 몇 가지만 적었다. 며칠후면 개학인데 아무 일 없이 개학이 되었으면 한다.

겨울 방학에 생긴 일

高 1-4 王 鴻 德

1월 1일, 오늘은 가게가 쉬는 날이다. 그래서 가족들과 놀러가기로 했다. 하지만 난 그날 친구들이랑 선약이 있었다. 애들이랑 신촌, 이대에 가서 놀았다. 친구가 이대에서 가방을 사고 나는 애들이랑 PC방에 가서 놀기로 했다. 근데 PC방에 가보니까 반 친구들이 있어서 PC방에서 조금 놀다가 이대에 가서 구경을 했다. 오늘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그래서 다음에 또 이런 시간이 많이 있으면 좋겠다.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재미있게 놀자구요!!

1월 2일, 오늘은 기분이 좋다. 왜? 내 열 다섯 번째 생일이니까! 그래서 오후에 친구들이랑 루루식당에 가서 아주 맛있게 먹고 그리고 신촌에 있는 노래방에 가서 1시간동안 노래를 했다. 애들이랑 이대에서 구경을 하고 오락실에서 오락을 했다. 오늘 너무 행복했고 재미있게 놀았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 또 가족들이랑 놀고 먹고てててててて 아주 힘든 날이었다. 아빠와 엄마한테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엄마가 나에게 DDR을 선물로 해주셨다.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 바로 집으로 가서 DDR을 연습했다. 재미있었다.

1월 4일, 오늘부터 나는 컴퓨터학원을 다녀야 한다. 학원이 끝나 동생과 엄마가게에 가서 일을 도와드렸다. 우리 집은 중국과자와 중국요리점을 하기 때문에 가게가 무지무지 바쁘다. 그래서 학원이 끝나서 가게에 가서 중국과자와 포장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학원에 11시까지 가야하기 때문에 엄마 아빠는 아침 8시까지 가게에 나가셔야 했다. 나는 매일 가게에 가서 일을 도와주고 일이 끝나서 할머니 집으로 가서 TV도 보고 책도 보고 오늘 하루 너무 힘들었다.

1월 5일, 오늘은 가게가 너무너무 바쁘다. 그래서 나는 가게에 가서 엄마를 도와 드리고 가게가 끝나 엄마와 집에 와서 아빠, 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같이 가니까 동생이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집에서 목욕도 하고 숙제도 하고 시험준비도 조금하고 자야지てててててて. 그래서 빨리빨리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서 엄마 아빠 나 그리고 동생이랑 가게에 가서 또 도와 드려야지!!

겨울 방학에 생긴 일

高 1-4 張 家 榮

나는 이번 겨울방학을 너무 기다리고 고대했다. 왜냐하면 새 천년과 21세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단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친구들과 롯데월드, PC방 DDR등 그 동안 시간이 없어 못했던 일들을 다 하기로 했다. 또한 컴퓨터학원과 기타학원을 다니기로 했지만 아빠께서 "넌 앞으로 대학 갈 준비를 해야지 무슨 기타야...."하고 소리치셨다. 그래서 기타는 나중에 배우기로 했다. 우리 가족은 12월 31일 밤 11시에 0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를 갔다. 목사님께서는 새해가 밝기 전에 올해 묵은 나쁜 일을 다 잊어버리고 새 천년을 맞이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는 더욱 더 보람되고 알찬 한해가 될 것을 당부하셨고 남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고 설교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기도를 했다. "새해는 부모님께서 바라고 원하는 아들이 될 것을 하나님과 약속합니다. 아멘!".

나는 99년에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 하지만 나쁜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2000년도는 좋은 일만 있길 바란다.

드디어 새 천년이 밝았다. 1월 1일 우리 가족과 친지분들 그리고 엄마 친구분들과 무주리조트를 놀러갔다. 일정은 2박 3일이었다. 모두들 들떠 있었다.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강원도 진부에 있는 Hotel Kim`s Club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선 호텔버스를 타고 무주로 갔다. 20분 뒤 드디어 바라던 스키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스키장은 사람이 만원이었다. 그러나 풍경하나는 캡이었다. 일단 복장을 갖추고 스노우보드 강사분한테 타는 요령을 배우고 스노우보드를 타기 시작했다. 모두들 처음이라서 계속 넘어지고 일어서기만 해도 쓰러졌다. 밤에서야 모두들 힘들었는지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건물에 있는 백화점을 쇼핑하기로 했다. 거기엔 노래방, DDR클럽, 헬스클럽, 수영장, 실내골프장 등이 있었다.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른 다음 어른들은 호텔에 올라가 덕담을 나누시고 애들은 DDR을 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호텔근처에 있는 눈썰매장을 찾았다.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근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어쩔 수 없이 호텔로 돌아갔다. 그날은 하루종일 호텔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날 아침 서울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속도로는 차가 너무너무 밀렸다. 나는 무척 짜증이 났다. 그래서 휴게소에서 배를 채우고 다시 출발했다.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5시간이나 걸렸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지쳐서 바로 잠이 들었다. 내겐 너무너무 재미있었던 날이었다.

방학동안 내겐 큰 기쁜 일이 생겼다. 바로 워드2급에 붙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님이 축하해 주셨다. 나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시험보기 전날 컴퓨터학원 원장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한국인도 아니고 화교이기 때문에 시험에 붙던 떨어지던 외국인으로서 하나의 경험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てててててて. 그래서 난 지금 좋은 충고를 해주신 원장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학원에서 내가 화교이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 주시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학원에서 한국학생들과 이질감을 느낄까봐 그러시는 것 같다.

방학동안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모두들 놀기 바빠서 방학숙제를 안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 중에 하나다. 매번 방학 때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꼭 대만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른 뒤론 한번도 못 갔다. 그래서 다음 방학에 갈 예정이다. 원래는 요번 방학에 미국을 가야만 했다. 하지만 스키장을 갔다왔기 때문에 또 다음에 가야할 것 같다.

몇 달 전부터 모두들 긴장했던 Y2K문제가 무사히 넘어갔다. 혹시 내 컴퓨터는 문제없겠지 하고 긴장했는데 아무 일 없이 해결됐다. 그래서 나는 미리 안철수 바이러스 백신이나 V3 98등 백신으로 대비했다(컴퓨터 배워두길 잘했다). 하지만 뉴스에선 아직 안심할 단계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밝혔다. 아직 더 두고본 다음 발표하겠다고てててててて.

나는 요번 겨울방학이 너무 뜻깊었다고 생각한다. 운 좋게 새 천년을 맞이하고 나이도 한 살 더 먹고 너무 기쁘다.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일들도 요번 방학을 통해 많이 할 것이다. 또한 떨어지는 과목을 보충할 것이고 방학도 재미있게 지낼 것이다.






겨울방학 이야기

中 2-1 周 香 麗

나는 요번 방학을 이용해 엄마랑 상주에 있는 친척집에 갔다왔다. 서울과 상주는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방학을 이용해 갈 수밖에 없다.

저번 여름방학 때 못 갔으니까 거의 일 년 정도 외삼촌과 이모네를 못 가 봤다. 그래서 굉장히 기쁘고, 또 궁금했다. 많이 변했을까하고てててててて. 그런데 만나보니 겉모습만 변했을 뿐 다정한 마음들은 여전했다.

상주에 도착한 첫날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조금 놀다 잤다. 이튿날에는 친척이랑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다. 상주 사람들은 거의 다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학교 갈 때, 일하러 갈 때, 시장 갈 때 등등 대부분 자전거를 이용한다. 그래서 거기에서는 자동차보다는 자전거가 '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루, 이틀 우리들은 아침에는 여기저기 돌아아니거나 오락실에 가서 요새 유행하는 '펌프'를 하고 놀았다. 밤에는 자전거를 타고 밤하늘을 구경했다. 서울에서는 날씨가 좋은날에도 밤에 별이 그리 선명하지도, 빛도 안 났었는데, 상주에는 별이 맨날 반짝반짝 또렷하게 보였다. 상주에서 본 밤하늘은 꼭 영화에서나 봤던 그런 예쁜 밤하늘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 즐거웠던 기억을 생각해보니 너무나도 친척들이 보고 싶고, 또 다시 그 예쁜 밤하늘을 보고 싶다. 그래서 난 요번 여름방학이 무지 기다려진다. 왜냐하면 여름방학 때 꼭! 꼭! 또 가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빨리 방학이 왔음てててててて.

방학 때 느꼈던 일

中 3-3 孫 孝 民

전 이번 방학 때 동해에 놀러 갔습니다. 전 누나와 함께 심야고속을 타고 내려갔습니다. 두 시간을 가고 서울을 빠져 나왔습니다. 서울을 빠져 나오니 건물도 서울같이 많지도 않아 좋았습니다.

지상에 불이 너무 밝으면 별이 안 보인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울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별을 두 눈으로 선명하게 볼 수 있을뿐더러 별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전 이 하늘 위에 별들을 오랫동안 아무 생각 없이 봐 왔습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이렇게 오래 하늘을 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를 갔다 오면 학원을 또 가야 하니 이제껏 살아오며 별을 오래 볼 시간도 없었던 거 같습니다.

전 동해를 갔다오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여유가 없다면, 또 잠시나마 자유의 시간을 못 가진다면, 그건 인생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인생에 쓴맛만 보는 것이라고요. 전 앞으로 저의 자유시간을 많이 가져야겠습니다.

방학 때 생긴 일

中 3-3 谷 美 英

저는 이번 방학을 다른 방학보다 더 보람있게 지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번 방학에 아르바이트로 한국 아이를 가르치기로 했으니까요!

어느 날 저는 버스를 타고 제가 가르치는 아이 집에 가는 길에 뜻밖에도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을 보았습니다. 그 장애인은 다른 사람에게 자리 좀 양보해 달라고 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자리를 양보해주시기는커녕 오히려 그 장애인을 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보다못한 어떤 학생이 자리를 비켜 주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버스 안에는 노약자 좌석과 장애인 좌석을 만들어 놓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버스 안에 그런 좌석이 있었어?"하고 말합니다.

우리가 장애인들에게 불편한 데가 나으면 무얼 할 거예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이 그냥 전철을 타고 많은 계단을 혼자 걷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그냥 평범하지만, 그들에게는 아주 이루고 싶은 소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렇게 건강하게 나아주신 어머니께 감사하고, 자기보다 더 불편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방학 때 있었던 일

高 1-1 譚 秋 錦

겨울방학 중 어느 날, 동네 친구와 함께 신촌에서 쇼핑을 하다가 친구가 갑자기 자기가 단골인 찻집을 가자고 했다. 때마침 할 일도 없었고 출출했던 터라 근처 빵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빵을 잔뜩 사들고 '민들레 영토'라는 곳을 찾아갔다.

아담한 유럽풍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향긋한 차 냄새가 코끝으로 다가왔다. 이어서 보이는 건 알프스 소녀를 연상시키는 종업원의 차림새와 마치 책방에 온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책꽂이 가득한 책들 그리고 문 옆에 누워있는 몸집이 약간 큰 털복숭이 강아지 한 마리.... 귓가에는 감미로운 클래식 음악이 들려오고 이러한 분위기가 나는 너무나도 맘에 들었다.

이 곳 '민들레 영토'는 시인이 운영하는 곳이라 그런지 여느 찻집과 다른 점이 여러 군데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찻값대신 문화비를 받는 것이다. 문화비 3,000원을 내면 3시간동안 이곳을 이용할 수 있다. 즉 이곳에 있는 시간만큼은 문화회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점 하나, 이곳 사장님은 소장님이라 호칭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곳 소장님이 '민들레 영토'를 경영하기 전에 '도시문화 연구소'라는 도시운동을 하는 연구소의 소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운영방식도 좀 특이하다. 처음 오는 손님에겐 이곳 소장님이 직접 지으신 시집을 주고 책꽂이 가득한 책들은 '민들레 영토'에 있을 때만큼은 마음대로 볼 수 있고 차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3회를 기준으로 예쁜 종이컵에 다시 채워서 먹을 수 있고 출출하면 컵라면도 공짜이다.

신촌을 많이 다녀봤지만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왜 진작 여길 찾지 못했을까?'하는 의문도 생겼고 이곳에 데려와 준 친구한테도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앞으로 이곳을 애용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찻집보단 하나의 '문화공간'에 더 가까운 '민들레 영토', 친구와 난 이곳에서 3시간을 다 채울 만큼 이곳이 너무 좋았다. 이곳은 문화공간답게 홈페이지도 있다. 집에 와선 컴퓨터를 틀고 이곳의 홈페이지로 들어가 보았다. 회원도 등록하고 이곳에 대해 모르는 정보들도 알 수 있었다.

신촌에 자리잡은 작은 문화공간 하나, 우리 같은 청소년들이 많이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방학 때 있었던 일

中 2-1 王 姸 楆

12월 24일-

친구랑 신천에 있는 'JRS'란 곳에 가서 일본 가수 '라르크'의 영상회를 보았습니다. 회원들은 입장료가 1,000원이지만 전 회원이 아니라서 2,000원을 내고 들어갔습니다. 사진 한 장과 사탕 하나를 받고, 자리에 앉자 불이 꺼지고 화면에는 'HIDE'가 비춰져 있었습니다. 아직 일본 가수에 대해서 별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솔직히 누가 나왔는지 자세히 기억도 안 납니다. 그저 생각나는 건 'HIDE', '라르크', 'LUNA SEA'일 뿐てててててて. 뮤직비디오 나오고, 인터뷰한 것도 있어서 입장료에 비해서 꽤 괜찮았다고 봅니다.

12월 26일-

역시 친구랑 '슈 정모'를 갔습니다. 27일이 어느 분 생일이어서 친구는 선물 사러 신촌에 먼저 가자고 했습니다. 한참 고르다가 시계를 샀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져서 전철역까지 마구 뛰었습니다. 전철 안에서 계속 걱정하며 약속 장소까지 숨이 차도록 뛰어갔는데 다행히도 제시간에 도착했습니다. 원래 가려던 '손노리 회사' 사장이 도망(?)치는 바람에 코스프레라는 곳에 갔습니다. 그러나 늦은 시간이어서 대충 한 번 둘러보고 거기를 나왔습니다.

꽤 일찍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집에는 7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더군요.

방학 동안 악기(베이스 기타)도 배우고, 크리스마스 자정 12시에 가족끼리 초를 켜고 소원도 빌었지만, 통신에서 동호회를 들었을 때보다 기쁘지 않았습니다.

에치오티(HOT) 동호회에 들었습니다. 아직 글도 하나 올리지 않았지만, 링크되어 있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정말 구하기 힘든 소설을 구했습니다. 또 그런 개인 홈페이지에서 자료를 받아서 자료실에 올렸더니 메일 친구도 많이 생겼고, 잡지사의 자료원으로 활동해주지 않겠냐는 메일도 받았습니다.

엄마한테는 많이 혼났지만, 저 나름대로는 방학을 잘 지냈다고 생각합니다.

방학 때 있었던 일

中 2-1 王 惠 里

일 학기 수업이 끝나고 시험도 다 끝나고, 드디어 기다려 왔던 방학을 맞이했다. 난 이번 방학 때 두 명의 친구와, 난 드럼 다른 두 명은 베이스기타를 함께 배웠다.

난 꿈이 있다. 밴드를 결성하는 것이다. 물론 공부를 하면서 말이다. 아직은 이렇다. 지금 내 나이가 어린 만큼 공부를 하면서 열심히 드럼을 배울 것이다.

난 음악을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기쁠 때, 슬플 때 항상 음악을 들으면 너무 좋다. 만약 음악이 없었다면 아마 내 생활은 비참하고 날마다 슬픔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음악을 만나면서 난 행복하고 보람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비록 지금 개학은 했지만 드럼은 계속 배울 것이다. 내 꿈을 이룰 때까지てててててて. 지금 내 마음은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드럼을 열정과 피나는 노력으로 해서 나의 꿈을 펼쳐내고 말 거다.

이번 방학은 내 생에서 잊지 못할 추억으로 기억되고 영원히 남을 것이다. 앞으로 영원히 음악을 사랑하고 내 드럼과 음악 속에서 내 생을 바칠 것이다.

I LOVE MUSIC and DRUM FOREVER!


방학 때 있었던 일

中 2-2 秏 嘉 鴻

드디어 방학이다! 다른 학교보다 하루 늦게 했지만 더 긴 즐거운 겨울 방학. 나와 언니, 동생, 이모, 할머니와 함께 광주 이모네로 갔다.

광주로 가는 도중에 고모할머니를 만났다. 고모할머니께서는 나와 언니, 동생을 데리고 가서 하룻밤 지내면 안되냐고 하셔서 우리는 할 수 없이 갔다. 그날 밤, 고모할머니께서 내 머리를 보시고 앞머리가 너무 길다며 앞머리를 잘라 준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조금만 잘라달라고 했는데, 너무 짧게 잘라서 정말 이상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모네로 갔다. 내가 들어가자 이모가 머리가 그게 뭐냐며 놀렸다. 그래서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이모네 있으면서 교회도 가고, 한사랑 마을이라는 곳도 갔다. 이모는 수요일마다 한사랑 마을에 가셨다. 한사랑 마을에는 장애인이 많았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를 돌보다가 애기들이 있는 곳에 갔다. 애기들이 너무 귀여웠다. 아기 천사 같다. 그 곳에서 머리가 큰 애를 봤다. 너무 불쌍했다. 전에 '칭찬합시다'라는 TV프로그램에서 한사랑 마을 이 나왔다. 그땐 별로 실감이 안 났는데, 실제로 보니 이런 애도 있구나하고 별 생각이 다 났다. 그 애는 머리가 너무 커서 하루 종일 누워서 지낸다. 정말 너무 불쌍했다.

나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또 오고 싶다.


방학 때 있었던 일

中 2-3 李 秀 珍

전 방학 동안 특별히 어딜 놀러 간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방학을 그렇게 의미 있게 보내진 못했어요.

음∼ 전 집에 있는 동안 컴퓨터로 통신을 했어요.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까 알게 된 사람도 몇 명 있고요. 모두 저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들이에요. 처음엔 언니라서 말하기도 불편했어요. 그런데 다들 너무 편하게 대해줘서 지금은 예전보다 더 친해졌어요. 요즘은 통신에서 만나면 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곤 해요. 또 언니들이 PC 통신에 있는 정보도 가르쳐 주시고요. 그래서 많은 도움이 돼요. 음∼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자주 만나는 편이 아니라서 좀 아쉬워요蝁蝁∼∼∼. 그래도 방학 동안 통신으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어서 너무너무 기뻐요!

앞으로도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고요.(음∼ 그런데 전화비가 좀 많이 나와서 걱정이 돼요蝁蝁∼∼∼.그래서 이제 좀만 하려고요てててててて.)






방학 때 있었던 일

中 2-3 臧 珍 瑩

긴 겨울 방학 동안 ACA전도 가고, 개그콘서트를 보러 가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얼마 전에 열렸던 코믹 월드에 갔던 일입니다.

코믹 월드는 아마추어 만화 동아리들이 판매전 등을 하는 행사입니다. 그곳에 친구와 갔는데,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ACA 전시회 때 사람이 너무 많아서 고생했던 일이 떠올라 이번엔 역시 좀 늦은 시간이지만 11시 40분쯤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긴 줄이 저희를 반기고 있더군요. 알고 보니 12시부터 입장てててててて. 어쨌든 입장을 하고 나니 대부분의 부스가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더군요. 한 30분 동안 둘러본 우리들은 잠시 밖으로 나와 시간을 때우다가 다시 들어가니 대부분은 준비들이 끝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상당히 예쁜 것들을 많이 구할 수 있었다는, 그중 가장 맘에 드는 것은 PENFAN이라는 그쪽 방면에서는 상당히 유명하신 분들의 팬시용품∼ 다이어리 속지인데 A,B세트 두 가지, 한 세트에 2,000원이라는, 결국 A세트 둘, B세트 하나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저기 구경하던 우리들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사람들이 많아지자 서둘러 그곳을 빠져 나왔습니다.

12월 달에 열렸던 코믹월드에서는 늦게 가고 거기다 사람들도 많아서 아.무.것.도. 못 사고 돌아왔지만 이번 코믹은 그런 대로 만족입니다. 4월 1∼2일에 또 열리는데, 그때는 PENFAN의 일러스트 CD를 판매한다고 하더군요.(꼭 가야지!)

음∼ 사람들이 여전히 많아서 좀 힘들었지만 어쨌든 재미있었던 하루였습니다.


봄 소풍

高 3-3 曲 仁 德

4월 14일 오늘이 바로 우리 학교가 봄 소풍을 가는 날이다.

아침 8시 10분이 집합시간! 나는 늦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집에서 나왔으나 일행이 늦게 오는 바람에 가까스로 학교에 도착했다.

우리는 서울을 벗어나기 위해 순환 도로를 타고 양평에 있는 용문산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빠른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 자리를 잡고 오손도손 모여 앉아 점심을 먹었다. 그곳은 산이라기보다는 조금은 황량한 느낌이 드는 벌판 가까운 곳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선생님과 함께 산책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약간 혼잡한 곳인 유원지가 있는 곳을 피해 다른 좀 외진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은 마치 도시와는 다른 고요함으로 구별된다고나 할까? 서울과는 공기부터가 다르고 조금 더 들어가니 저수지 비슷한 데가 있는데 물이 너무나 맑아 바닥 밑까지 들여다보일 정도여서 나같이 메마른 정서를 가진 사람도 물에 손이라도 담그고 싶은 충동이 일기에 충분했다. 서울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도 이런 깨끗한 환경이 주어진 곳이 있다니 약간은 놀라웠다. 그리고는 다시 나와 장터 비슷한 곳을 보았지만 그곳에서는 아주 이상한 것을 팔고 있었다. 개구리 알, 도롱뇽 알, 뱀 같은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저런 것을 사는 사람이 정말 있기는 있는가 보다 하며 그곳을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같이 도토리묵과 감자부침을 먹으며 우리의 마지막 추억의 한 장을 접었다.

이제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소풍이 막을 내렸다. 설렘은 항시 우리에게 활력의 힘을 제공하는 것인가 보다. 이제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의 만남을 기약하며 추억의 한 장을 마감한다.


봄 소풍

高 2-1 王 粳 貞

포근한 봄이 우리 곁에 왔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 소풍날이 드디어 다가 왔다. 소풍날 아침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창문을 열고 날씨를 보는 일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뉴스에서 날씨가 약간 흐릴 것 같다고 했기에 걱정이 많이 되었었다. 그러나 날씨는 우리의 마음을 읽은 듯 춥지도 덥지도 않은 화사한 봄 날씨였다. 친구들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을 생각하니 히히히 웃음소리가 저절로 나왔고 한참 이리저리 한껏 멋을 낸 나는 기숙사에서 나와 김밥과 음료수 과자를 잔뜩 들고서 목적지를 향해 버스에 올랐다. 시간이 되자 차는 출발했고 차안에서 우리는 온통 먹고 떠들고 마시고 축제의 한마당을 연출했다. 차에서 내릴 쯤에 우리는 힘이 거의 다 빠져 있었다. 그러나 젊다는 게 뭔가? 힘들어도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우리는 또 다시 함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이번 봄 소풍의 목적지는 용문사였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라 과연 어떤 곳일까 궁금했는데 도착하고 보니 생각보다도 풍경이 너무 예쁘고 맑아서 사진도 많이 찍고 신나게 놀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정말 신났었다.

생각해 보면 봄 소풍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것만 같지만 추억이 있기에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단지 다시 한번 더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소풍이 오려면 아주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겠지만 그 동안 또 열심히 공부하며 좋은 그날을 기다려야지. 놀 때도 공부할 때도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이번 소풍은 잠시 마음속에 추억으로 담아 두고 싶다. 다음 소풍을 기약하며てててててて.


봄 소풍

高 2-1 賀 昭 允

기다리고 기다리던 4월 14일! 나는 바쁘게 준비를 마치고 학교로 향했다.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학교 운동장에는 벌써 봄옷으로 단장한 아이들이 설렘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와 친구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온통 기쁨으로 설레는 가슴을 안고 차에 올랐다. 나는 원래 버스를 타고 달리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터이라 더더욱 나의 가슴은 한없는 봄의 들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 탄 우리는 모두 버스가 출발하기도 전에 김밥 샌드위치 과자 등을 꺼내어 나누어 먹기 시작했고 마치 모두들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듯이 빨리들 김밥을 먹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모든 사람들의 김밥 맛이 다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출발한 버스는 점심이 되어서야 우리를 목적지에 내려놓았다. 처음 용문사를 간 나는 사실 많이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곳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작은 곳이었다. 곧 우리에게는 오후 4시까지 자유 시간이 주어졌고 나는 친구들과 용문사 사찰에 가기 위해 산행길에 올랐다. 그곳엔 나무와 풀 그리고 깨끗한 시냇물까지 있어 산책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기나긴 길을 걸어 절 앞까지 간 우리는 사찰을 한 바퀴 돌고는 맑고 깨끗한 냇가로 내려가 손을 담갔다. 날씨는 따뜻하지만 물은 아직도 차가웠다. 그곳에서 우리는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아름다운 경치와 맑고 신선한 공기 그리고 맛있는 김밥이 어우러져 정말 행복한 오후의 한 때를 보냈다. 내려온 우리는 놀이 기구를 타려고 표를 사서 '급류타기' 라는 놀이 기구를 탔다. 좀 무서웠지만 짜릿하고 재밌었다. 놀이기구를 탄 우리는 그늘가에 앉아 얘기도 하고 과자도 먹으며 시간을 흘렸다.

오후 4시가 좀 넘어 버스는 학교로 향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너무 피곤해서인지 먹는 것도 다 마다 한 채 잠이 들어 버렸다. 저녁 6시쯤 우리는 서울에 도착했다.

이번 봄 소풍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데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사촌들과의 겨울 방학

高 1-3 孫 粝 容

나는 잊지 못할 겨울 방학을 보냈다. 서울에 사는 사촌들이 봄방학을 해서 오랜만에 놀러 왔는데, 그 시간이 너무나도 새롭고 즐거웠다.

이모와 사촌들은 강릉의 중앙시장을 구경하러 가자고 해서 바람도 쏘일 겸 같이 따라 나섰다. 봄방학을 아직 하지 않은 학교가 있어서인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무척 많았다. 시장을 구경하다가 멋진 가방도 보고 마네킹에 입혀 있는 예쁜 옷들도 보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눈에 가장 뜨인 것은てててててて맛있는 "호て떡"이었다(우린 돼-지)!! 사촌들을 비롯하여 나는 서울에서 호떡을 많이 먹지 못했는데 여기에 와서 먹어보니 꿀맛이었다. 그냥 밀가루 반죽이 아닌 감자 으깬 것과 당근 등의 야채가 섞여 아주 일품이었다(오-예-!!).

다음 날, 우리는 정월 대보름이라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가까운 목욕탕에 갔다. 아침이어서인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서로서로 때를 밀어주고 비누칠도 해주니, 더 친해진 것 같아서 좋았다. 기분 좋게 목욕하고 이모부를 따라 우린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 장소는 바로 "국제 빙상 경기장"이었다. 부푼 마음에 모두 함성을 질렀고, 다들 기대를 많이 했다.

아빠와 사촌언니, 사촌동생, 남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 갔는데 나와 사촌들이 닮아서일까?? 저 뒤에서 얘기하고 있던 아주머니 네 분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마치 우리가 한 가족인 냥 모두 쳐다보고 있었다(멀뚱멀뚱-). 아빠는 뒤로 돌아보지 않으셨는데도 심상치 않은 시선을 느꼈다고 한다(등골이 쑤-얼-렁). 아마 아주머니들께서는 딸 셋 낳고 겨우 아들 낳은 걸로 생각하셨나보다. 우리는 스케이트를 재미있게 탔다. 한참을 스케이트를 타는데 발목도 아프고 그래서 자꾸 넘어지고 굴렀다. 무릎에 멍이 들고 복숭아뼈 부위에 물집이 생겼어도 우리는 마냥 즐거웠고 재미있었다. 운동을 한 후에 먹는 소세지 또한 맛있었다(우린 역시 돼-지-푸히히).

저녁에 아빠는 회 먹자고 하시면서 일식집으로 향했다. 저번에도 왔었는데 이번에 사촌들과 오니 느낌이 또 달랐다. 우동으로 시작하여 회, 해물, 초밥, 튀김, 구운 청어, 알탕 등으로 계속 메뉴가 줄줄-(내 침도 줄줄-) 나왔다. 먹으면 나오고, 또 먹으면 또 나오고, 자꾸자꾸 나오니까 배가 불러왔고, 나중에는 거의 터질 지경까지 이르렀다(꺼억-). 하지만 집까지 걸어오면서 소화가 다 되었다. 정말 난 위대(胃大)하다. 흐-흐-.

집에 다 왔을 때 길어진 머리카락을 보고 잘라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촌동생도 잘라야 한다고 해서 같이 미용실에 들어갔다. 늦은 시간인데도 언니는 정성스럽게 잘라 주었고 그래서 좀 미안했다. 우리의 많은 요구사항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 신경 써 주는 언니가 고마웠다. 집에 와서 어른들께 자른 우리 머리를 보여드리니 모두들 예쁘다고 칭찬하셨다. 하지만 사촌동생은 자른 헤어스타일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나보다(얼굴이 계속 찌뿌둥-).

정월 대보름에 정말 알차고 멋진 날을 보냈던 것 같았다. 사촌들과의 시간이 너무 즐거웠고 신이 났지만, 며칠 후에 사촌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아쉽고 섭섭하다. 그래도 다음 방학 때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며 많은 기대를 해본다.








<우리들의 생활 이야기>

"꿈" 속에서

中 2-2 錢 錦 汶

꿈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미래의 희망의 꿈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잘 때 자주 꾸는 꿈이다. 난 이번 방학 때 유난히 신기하고 생생한 꿈을 많이 꿨다.

그 중에서 진짜 신기한 꿈을 꿨다. 난 분명히 자다가 깼는데 아직도 꿈 속인 것이다. 눈을 떠서 주변을 보니 내가 자기 전과 똑같았다. 난 우리 집이구나 하고 안심을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4천, 5천, 6천てててててて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계속 중얼거렸다. 난 너무나 생생해서 내가 지금 깼구나 하고, 귀신 소리인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무섭고 해서 옆에서 자고 있는 동생을 깨웠다. 하지만 동생은 내가 아무리 꼬집어도 일어나질 않았다. 난 나를 꼬집어 봤다. 하지만 전혀 느낌이 없었다. 그 순간, 난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 하고, 계속 깨려고 했는데 자꾸 깨어도 똑같았다. 난 꼭 가위에 눌린 것 같았다. 그래서 크게 소리를 질렀더니 꿈속의 동생이 일어나 나한테 다가왔다. 난 무서워서 날 세게 꼬집었더니 일어났다. 드디어 꿈에서 깼다. 밖을 보니 밝았다. 난 그제서야 안심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간이 콩알만해서 귀신을 많이 무서워했는데, 그 꿈 덕분에 귀신이 더 무서워지고, 이제는 밤에 자는 게 정말 끔찍하답니다. 참 신기한 꿈이죠?


나의 학교 생활

高 2-2 金 梨 智

사람들은 늘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나도 그렇다. 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일이 생긴다.

학생이란 학교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더 많지만, 학교에서 사귀는 친구들과 존경하는 선생님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너무 좋다. 때로는 공부가 싫고, 싫은 일도 많이 일어나지만 그런 것도 고교 생활의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소중한 것들을 알았고, 많은 것을 배운 지금 나는 부족할 게 없다. 친구와 우정을 쌓으면서 수다도 떨고, 좋은 과목 실은 과목 다 열심히 공부하면서 몰래 과자도 먹고,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선생님께 혼나는 일도 많았다. 물론 이런 일들은 흔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추억들이다. 또 우리 학교는 특별 활동도 많아서 내가 좋아하는 써클에도 들어가 좋은 선배들과 써클 선생님이 있어 정말 즐겁다.

우리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다 소중한 것 같다. 행복한 일도, 정말 살기 싫을 정도의 일들도 일어나는 학교. 나는 이 학교에서의 생활이 정말 좋았고, 앞으로도 더 많은 추억과 더 많은 친구를 만들 것이다.

앞으로 곧 고3이 되는 지금, 더 열심히 공부해서 기억에 남는 추억을 담아서 남은 학교 생활을 더욱 열심히 할 것이다.


낭떠러지의 끝

中 3-3 牟 德 分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정해놓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냥 그 때 그 때 내가 가장 원하는 것, 내게 가장 필요한 것 일거라는 막연한 생각만 했을 뿐てててててて.

하지만 이젠 알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가치 있는 건 건강, 즉 완벽한 생명이라고. 지금 우리가 완벽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생명 이외에 그 어떤 것을 생각할 겨를, 순간의 여유조차 없을 것이다.

인간의 욕심이란 게 꼭 끝이 잘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같다. 분명 끝이 있지만 그 끝은 잘 보이지 않고, 그리고 그 끝에 가고てててててて, 또 그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다. 욕심이란 낭떠러지의 끝은 아마도 완벽한 생명을 잃었을 때일 것이다.

난 적어도 나만은 낭떠러지의 끝에 갔을 때 비로소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싶진 않다. 그전에 진정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인지 깨닫고 또 그것을 소중히 지킬 것이다.





미래에도 대학 간판이 필요할까???

高 2-2 李 知 洪

대학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저는 대학이라는 곳을, 모든 사람이 무조건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과 같이 컴퓨터와 인터넷이 급속도로 발전되고 있는 이 정보화 시대에서, 옛날과 같이 대학을 나와야만 취업이나 인생길이 트일 수 있는 시대는 이미 물 건너갔다고 봅니다.

예를 들자면, TV에서도 나왔듯이, 어느 한 고등학생이 컴퓨터를 이용해 벤처기업을 만들어서 현재 크게 커나가고 있는 것이나, 컴퓨터 게임을 좋아해서 게임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 즉 게임 프로그래머들도 현재 급속도로 번져 나가고 있으며, 자기만의 아이디어와 독창력을 발휘해 지금까지 없었던 생활에 유용한 물품들을 만들어 특허를 내고, 자기혼자 독점으로 이 물품을 팔며 돈을 법니다.

이처럼 지금 얘기한 몇 가지 사례들만 보아도,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자신이 노력만 하면, 대학을 나온 사람들보다 얼마든지 더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생각하는 바는 여러분이 대학이라는 곳을, 아무 계획 없이, 부모님들이 좋은 대학을 꼭 가야 된다고 하여서, 여러분들의 주장이나 의견 없이, 그냥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이니까 따라야 되겠구나 하는 식으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실제 있었던 사례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어느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의과에 가서 의사가 되길 무척 바랬고, 또한 자기 아들더러 의사를 하라고 시켰습니다. 결국 그는 의사가 되어 내과 과장까지 승진을 하였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그는 바로 의사 옷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왜 그는 내과 과장이라는 높은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바로 옷을 벗었을까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요즘과 같이 경쟁 시대에선, 무턱대고 자신이 원하지도 않으면서 아무 대학 아무 과나 들어갑니다. 지방 대학은 그렇다 치더라도 심지어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대학을 나온다 하더라도 취업이 안 되는 경우가 생기는, 공연히 대학 생활 4년을 허비하는 것과도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이 목표를 정해서, 대학이라는 곳을 꼭 가야 된다는 옛날 식의 고정관념을 깨십시오. 그렇다고 대학을 무조건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장차 하고 싶은 일이 대학과 관련된 것이고, 또한 대학을 나와야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수가 있더라도 자신의 목표와 꿈을 위해 대학에 진학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 글 전반부에서 말씀드렸듯이, 대학을 굳이 나오지 않고도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목표와 꿈을 이룰 수 있다면, 옛날과 같이 자신의 목표와 관계가 있던지 없던지 대학은 나와야 된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생각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참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흥미 있는 일을 택해서, 목표를 그것으로 정해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자기의 소질과 재능에 미래의 장래를 결정하고, 나아가 사회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분야에 소임을 다 할 때, 그것이 나라에 애국이요 충성이고, 자기 자신에게는 이상과 평화를 꿈꾸는 행복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상구

中 3-3 高 慧 丞

빌딩, 아파트, 건물엔 다 비상구가 하나씩은 있다. 비상구는 정문과 후문 말고 따로 밖으로 나올 수 있는 통로다. 그렇다면 우리 청소년에겐 비상구가 있을까?

마땅히 갈 곳 없는 우리 청소년들에겐 정말 필요한 비상구가 없다. 내가 말하는 비상구란 따로 나올 수 있는 그런 통로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롭게 쉴 수 있는 곳을 뜻한다. 비행 청소년, 십대 매춘 등은 다 우리가 쉴 만한 비상구가 없기에 만들어진 일들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비상구를 만들어 주길 바라는 것보단 우리가 직접 나서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

비상등을 보면 사람이 뛰어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난 빨리 우리 청소년들이 지옥 같고 쓰레기 같은 더러운 세상에서, 비상등에 그려져 있는 사람처럼 비상구를 통해 탈출하길 바란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

中 3-3 顧 大 良

흔히 말하듯이 시골 사람들이라고 하면 모두 좀 더럽고, 좀 그런 이상한 느낌이 있는てててててて,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면 '촌닭'이라고 하는데てててててて.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참에 나는 요번 겨울방학 때 시골에 가서 시골 체험을 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무엇을 한다고 '촌닭'이라고 하고, 그리고 시골이 안 좋다는 것이 어디 있는지てててててて.

우리 일행은 함께 큰 차를 타고, 시골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좀 가고 나니 서울에 많이 떨어져 시골 향기가 점점 느껴지더군요. 차를 타고 가는 중 나는 창문을 열고 바깥 풍경을 감상할까 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완전히 도시와 정반대군요. 도시에선 많은 고층빌딩과 아파트 등 많은 건물이 있는데, 여기는 아주 조그만 집이 있고 많은 나무와 산이 있군요. 나는 큰 숨으로 쉬었는데 어디에서 나는 이상한 냄새, 그게 바로 '소똥' 냄새였습니다. 다들 이 냄새가 이상하다고 그러는데 운전기사 아저씨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좋은 냄새들이야. 이놈들아!" 그러면서 창문을 모두 열더군요. 우린 할 수 없이 냄새를 맡고 시골 도착지에 갔습니다.

시골에 도착하고, 어느 할아버지 집에서 묵기로 했습니다. 우린 그 할아버지를 가이드로 삼아 같이 따라가고 관광하듯이 걸으며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길을 가다가 농장도 찾아가 보고, 산에도 올라갔습니다. 농장에 가서 보니 산딸기, 그리고 사과도 있군요. 우린 따서 먹고 재미있게 일도 도와주고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린 정에 출발하고 서로서로 안녕하면서 떠났습니다. 이젠 나도 시골 사람이 된 것처럼 도시가 자꾸 낯설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시골도 그리 나쁘지 않은 곳이군요. 나는 이 복잡한 도시에서 사는 것보다 이상하게 시골에 사는 게 더 좋은 것 같네요.


아름다운 세상

高 2-4 姜 仁 元

21세기에 방금 발을 내민 우리들, 여기서 우리들은 새 천년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로지 현대화, 기술화, 정보화만을 강조하는 사회, 우리는 혹시 인간의 근본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을까요?

현대화 사회, 그것이 뜻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제가 느끼는 현대화 사회는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잔인합니다. 사람들은 오직 자신 생각만 하고, 심지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을 기준으로 하는 심리,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합니다. 그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옛부터 내려오던 "친절"과 "효도", 사람들 사이에 흘러 다니는 "정", 이런 것들은 아예 모습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옛날로 돌아가 봅니다. 그때는 "돈"이라는 악마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단순한 물물교환을 통해서 모든 물건들을 교환합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옛사람들 사이의 "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효자,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위인들, 그들은 요즘 사회에서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 사이의 기본 법칙-믿음, 그것은 과연 요즘 사회에서 존재합니까?

우리는 오직 현대화만을 강조한 나머지, 우리의 근본을 잊어버렸습니다. 인간은 가장 총명한 동물이지만, 한 마리의 개보다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개는 적어도 자신의 주인한테는 충실하니까요. 저는 요즘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항상 아쉬워합니다. 그렇게도 순진해 보이고, 깨끗해 보이는 마음씨, 정말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를 묻혀 원래의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의 거리는 너무나도 멉니다. 정말 너무나도 슬픈 일입니다.

천사가 악마로 되어 가는 길, 과연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요? 저는 차라리 옛날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풍요는 없지만, 최소한 그곳의 "정"은 넉넉합니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못 봐서 해를 끼치는 사람, 자신의 권력을 함부로 써서 남을 괴롭히는 사람, 돈과 명예를 위해서 무엇이든 다 하는 사람. 선의를 악으로 보답하는 사람, 이들은 세 살 짜리 어린이조차도 못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아름다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동심의 세계처럼 맑고 깨끗합니다. 오로지 사랑, 정, 의리, 효도만이 존재하는 세상,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현대화 사회로 되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21세기에는 현대화, 정보화, 기술화 등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천년의 도래와 함께, 우리는 잃어버렸던 좋은 것들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아름다운 세상"도 빨리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약속

高 1-3 鄒 美 娜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약속을 한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또는 성의 없이 약속을 어기고 살아간다.

약속의 종류도 여러 가지다. 자기와의 약속, 다른 사람(부모, 친구, 동료, 상사)과의 약속, 대중과의 약속. 그리고 또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약속 중에는 꼭 지켜야할 약속과 그렇지 않은 약속이 있을 수도 있다. 즉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약속이라 함은 "장래의 일에 대하여 상대자와 서로 결정하여 둠"이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든 또는 안 하든, 꼭 지키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상대자의 의견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약속을 어기면 기분 나쁘고 화가 난다. 즉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약속을 상대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속은 지키기 위해서 약속을 하는 것이지, 어기기 위해서 약속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간단한 약속이라도 잘 생각하면서 약속을 하고, 또 약속을 했으면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어진 친구와 사귀어라

中 1-1 孔 慶 世

나는 <공자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 친구 사귀는 내용이 마음에 남았다. 그 이야기 내용은 공자님께 한 제자가 찾아와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까하고 묻자 공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첫째, 정직한 사람이 어진 친구이다.

둘째, 신의 있는 사람도 어진 친구이다.

셋째, 보고들은 것이 많고 학식이 깊은 사람이 어진 친구이다.

이 세 종류의 사람이 바로 유익한 친구라는 말씀을 읽고 나는 나의 조상 공자님의 말씀처럼 어진 친구도 사귀고 나도 친구들에게 어진 친구가 되기로 노력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새해의 목표로 정하였다.

희망

中 3-3 鄒 智 姸

희망은 모든 이들에게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준다. 희망이 없는 세상은 아마 암흑과도 같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부자가 될 거라는 희망, 아픈 사람에게는 건강해 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우리 같은 학생들한테는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업을 갖고 싶은 희망이 있다.

얼마 전 TV에서 저만한 또래의 학생이 자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신장을 이식한 장면을 보았다. 그것을 보면서 정말 감동 받았다. 그들의 희망은 바로 진정한 삶, 건강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정말 소중한 게 무엇인지 잃고 사는 것 같다. 우리의 희망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얻어 출세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건강하고 평범하게 별 탈 없이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네들이 가장 원하는 희망이 아닐까?


















<독서 감상문>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 인테넷에서 뽑은 '그리스 로마의 신들' -

高 3-4 任 慶 麗

<그리스 로마 신화>는 고대인으로부터 구전되고, 현대의 시인이나 또는 비평가들에게도 널리 인용되고 있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저자인 토마스 불핀치가 깊은 관심과 연구 활동으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전설 이야기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책은 올림푸스의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로 지극히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처음으로 접하는 이에게는 유럽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이야기는 세계와 인간의 기원, 운명에 맞서는 영웅들의 모험담, 별에 얽힌 슬픈 이야기, 신과 인간의 갈등,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등 풍요로운 내용으로 전개되어 있으며, 그 중 신들과 인간 또는 요정들이 꽃과 나무 혹은 동물 등으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이 책에 흥미를 더 해준다.

신화에는 수많은 신들과 영웅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제우스(주신), 포세이돈(바다의 신), 아폴론(태양의 신), 볼칸(대장장이의 신), 다이아나(달의 신), 박카스(술의 신)와 같은 신들은 나에게 큰 관심을 주었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정리해 보았다. 아울러 신화를 읽고 있는 동안만은 우리의 상상력을 더욱 돋보이고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제우스] 우주를 다스리는 지배자로 모든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인 제 우스는 구름 속 산 정상에 그의 왕국을 건설하였 는데, 성서의 신들처럼 전능하거나 엄숙하지는 않 았다. 그는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막 재 아들로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자식 중 하나에 게 권좌를 빼앗긴다는 예언 때문에 운명을 피해 보려고 갓 태어난 자식들을 삼켜 버렸지만, 그의 아내 레아는 제우스를 낳자 돌을 아이라고 속여 살아 날 수 있었다. 그가 성장하자마자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고, 그의 첫 번째 아내 테티스(지혜의 여신)의 도움으로 아버지에게 약을 먹여 형제들을 토하게 했으며, 그의 형제들과 제비뽑기를 하여 각기 하늘과 바다, 지하 세계를 나누어 지배하기로 하였다. 또한 그는 바람둥이로 수많은 여신들과 님프, 심지어 유부녀까지도 그의 여인은 셀 수 없이 많았고, 사튀로스(半人半馬), 독수리, 황소, 백조 등으로 변신하면서 많은 여인들이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그의 동생 헤라와 결혼해서 대장장이의 신 볼칸과 헤베마르스(아레스)와 같은 신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헤라는 늘 질투와 증오가 많았기 때문에 많은 여인들을 비운에 처하게 만들곤 했다. 비록 그는 바람둥이였지만, 한편으론 세상에 굽어보이는 모든 일을 다스리고, 분수에 맞지 않게 욕심 내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과 거인, 신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벼락은 그의 무기였으며, 아이기스라는 방패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총애하는 새는 독수리였다.

[포세이돈]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제우스의 형제이며 바다와 물의 신이기도 한 포세이돈은 그의 어머 니 레아가 그를 낳자 망아지 한 마리를 자신의 아이라고 속이고 크로노스에게 주어 살아나게 되 었다. 위기를 모면한 포세이돈은 그 후 로도스섬 에서 자라게 되었고, 그가 성장하자 볼칸이 지어 준 바다 밑의 황금궁전에서 살았다. 그의 아내 암 피트이테와 안락한 생활을 보냈으며, 때로는 궁전 에서 나와 황금 전차를 타고 파도 위를 달렸는데 돌고래들이 황금 전차 주위를 뛰어 올랐다고 한다. 또한 포세이돈은 그의 아내 암피트이테에게 청혼할 때, 돌고래가 깊은 바다에 있는 그녀의 거처를 찾아냄으로써 에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하늘에 돌고래 별자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아주 흥미로운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아내인 할리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성질이 너무 포악해서 아버지인 포세이돈이 땅 속 깊이 가두어 버렸다고 한다. 비록 많은 포세이돈의 자식들이 헤라클레스에게 맞아 죽었지만, 모든 그의 아들들이 악당인 것은 아니었다. 신이 된 아들과 영웅이 된 아들처럼 훌륭한 아들도 있었다. 그의 성격은 마음만 먹으면 무기로 폭풍을 사납게 만들 수도, 호수처럼 잔잔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이처럼 다혈질이고 흥분하기 쉬운 그는 남들과 쉽게 다투기도 하고, 여러 신들과 영토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아폴론]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 태어난 아들 아폴론은 올림푸스의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존경을 받는 신으로서 태양의 신, 궁술과 예언, 음악의 신이기도 하였다. 그는 침착하고 차분했으며 적들과의 싸움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운동과 음악에 능숙하였 고, 올림포스에서 제우스 다음으로 권력이 있게 되었다. 많은 님프와 인간들이 그를 사랑했지만 그는 정식으로 결혼한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눈부 시게 아름다운 다프네에게 청혼을 했지만, 그녀는 순결을 지키며 숲 속에서 사냥하며 뛰어 놀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남자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겁먹은 다프네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구원을 하고, 딸에 애처로운 모습을 보다 못해 그녀를 월계수(月桂樹)로 만들었다. 마침내 아폴론은 깊은 상처만 남고 자신의 사랑을 저버린 다프네를 잊지 않기 위해 월계수 잎으로 만든 관을 쓰고 다녔다는 슬픈 사랑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그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난 후 다른 여인에게 다시 청혼한 적이 없었다. 그의 여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음악의 여신인 킬리오페는 최고의 음악가였고, 아폴론에게 받은 리라를 켜면 사람들은 물론 신들과 짐승까지도 그의 음악을 즐겼다고 한다.

[헤파이스토스] 제우스의 절름발이 아들 헤파이스토스(볼칸)는 그의 어 머니 헤라가 병신이라는 이유로 낳자마자 버렸다. 일설에 의하면 제우스와 헤라가 심하게 부부 싸 움을 하였는데, 이때 볼칸이 어머니 헤라의 편을 들자 화가 난 제우스가 올림푸스 밖으로 하루 종 일 계속 떨어뜨려 렘노스섬에 도착했지만 이 사 건으로 그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또한 그는 그리스의 불과 대장장이의 신이며, 올림푸스 신들의 궁전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아폴론의 무기인 활과 화살, 작품에 있어서 가장 걸작인 판도라(인류 최초의 여자)도 그가 만든 것이다. 그는 신들 가운데 가장 추남으로 신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신인 비너스와 결혼했다. 비록 그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인정이 많은 그는 고운 마음씨를 가져서 자기를 내버린 어머니 헤라와 쉽게 화해를 했다. 못생긴 탓인지 성실한 성격 때문인지 볼칸은 그렇다 할 연애 사건이 없어 그의 자손에 대한 이야기도 많지 않다.

[아르테미스] 아폴론의 쌍둥이 누이 아르테미스는 달의 신이며 또한 사 냥의 신이다. 비록 그는 올림포스의 열 두 신에 속하지만, 그녀는 생애의 대부분을 올림포스 궁전 에 머물기보다는 숲 속이나 산에서 사냥을 하며 수십 명의 요정들을 시녀로 거느리고 또 여러 마 리의 사냥개를 몰고 다니며 사냥을 즐겼다. 그녀 는 순결을 사랑해서 결혼도 연애도 하지 않았다. 요정들 역시 여신과 마찬가지로 순결을 지켜야 했고, 이를 어길 경우에는 여신은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매정한 아르테미스지만 약자들에게는 많은 자비를 베풀었고, 자유롭게 살았던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디오니소스] 술의 신이며 모든 곡식의 생산을 다스리는 그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나기 전에 이들 사이를 질 투한 헤라는 복수를 위해 음모를 꾸몄다. 헤라는 세멜레에게 제우스의 사랑을 진정으로 받고 있다 면 그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을 심어 주었다.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본 보습을 보 여 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랐다. 연약한 세멜레에게 제우스는 자신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 걱정했지만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모습 을 드러냈다. 번개로 둘러싸인 힘이 너무 막강해서 그녀는 번개를 피하지 못했다. 헤라의 복수는 성공하고 그녀는 임신 육 개월째였다. 다행히 여신 기이아가 뱃속 아이를 불에 타지 않도록 했다. 이 아이가 바로 디오니소스였다. 그는 성장했지만, 헤라의 집요한 복수에 이번엔 미치게 만들어 추방해 버렸다. 그후 제우스의 어머니 레아가 그의 미친 병을 치유해 주고, 그에게 종교 의식을 전수해 주었다. 또한 그는 여행을 계속하면서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담그는 법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신앙을 전파했다.





<나는 책이 참 좋다>를 읽고

中 3-2 徐 吉 全

"책에는 황금밖에 없다." 이 속담은 옛사람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자, 머리에다가 꼭꼭 심어 놓은 씨이다.

세상에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작가와 같이 책을 읽을 때에 한 가지 버릇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좋은 문구를 발견하였을 때 줄을 쳐 놓는 버릇일 것 같다. 나도 이런 버릇이 좀 있다. 친구 중에는 깨끗한 책을 버린다고 질겁을 하는 아이도 있지만 어느 날 저녁, 뜻하지 않게 펼쳐본 책에서 너무나 좋은 문구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그 아이는 모르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내가 읽은 책 <나는 책이 참 좋다>는 작가가 책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방 한 쪽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책을 모아놓고 지난 날 작가를 감동시켰던 구절들을 옮겨 적어 놓은 것이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정말로 할 말을 잃었고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책, 얼마나 좋은 것인가! 나를 가르쳐 주고 감동시켜 주며, 때론 울게 하고 때론 웃게 하는 기특한 것. 내가 모르는 것을 알게 해 주고 내가 누리고 싶었던 인생을 대신 체험하게 해 주는 책들. 인생에 있어서 책을 읽는다는 것만큼 즐거운 것은 없을 것이다.

요즘 인터넷에 보면 자신이 읽었던 책들에 대한 독후감을 올리거나 명문장들을 발췌하여 올리는 독서광들이 많이 늘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좋은 문구들을 채록해 내는 것 역시 이 책의 지은이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싶다. 나도 기회가 된다면 사이버 세상을 통해 앞으로 읽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이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

정말 나는 책이 참 좋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그대에게>를 읽고

中 3-1 王 煢 煢

작가 서유나가 쓴 <나보다 더 사랑하는 그대에게>라는 시집을 읽었습니다. 그 시집 중에 "운명"이란 시는 감동적이었습니다. 싯구는 짧지만 깊은 뜻이 함축되어 있는 듯 했습니다. 시는 뜻이 깊어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것 같아요.

이 시집은 "사랑"에 관한 시인만큼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시집의 시는 읽을수록 푹 빠지는 것 같아요. 이 시집 중에 "회상"이란 시도 있는데, 그 중에서 "깊은 한숨과 어색한 울음 쏟아도, 사랑이란 이름 하난 아름답기만하다"는 글귀는 정말 깊이 가슴속으로 스며 들어왔습니다.

시는 감정으로 쓴다는 말이 있지만, 저의 생각은 시는 인생 그 한 부분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시를 많이 읽으면 감정이 풍부해 지는 것 같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생을 알고 그것들을 글로 짧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 전 부럽기만 합니다. 어린이 시집부터 유명한 시집까지 어떤 시라도 제목 하나 가지고 글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시 쓰는 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 보입니다.

저도 시를 좋아합니다. 써본 적도 있고 시를 외운 적도 있습니다. 시도 소설처럼 읽는 사람들, 그 사람들도 "시"에 매력을 느꼈을 것입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고

中 3-1 谷 德 英

이 책의 내용은 제제란 아이의 모습을 담은 이야기다. 너무 장난을 쳐서 매맞기도 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기도 하면서 제제가 커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처음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이모가 나에게 처음으로 선물을 하신 것이 바로 이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동화책이 아닌 책을 처음으로 읽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땐 나무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신기하기만 할 뿐이었다. 난 나무랑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후반부쯤 읽었을 때, 제제가 커가면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에 나는 너무 슬펐다. 그리고 맨 끝부분, 제제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てててててて.

정말 너무 슬펐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진실의 삶의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람세스>를 읽고

中 3-1 孫 慧 君

난 전문적 지식이 별로 없다. 그래서 내 맘대로 이 책을 평한다. 음∼ 이 책을 평하자면, 우선 재미있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이 책을 읽은 뒤 책에 재미를 붙여서이다.

'람세스'라는 이름은 어느 일본 작가의 만화에서 시리즈로 만났다. 최고의 이집트 전문가라는 크리스티앙 자크가 이집트의 역사, 문화, 생활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고대 이집트의 역사적 인물 람세스 2세의 생을 그려 낸 장편 서사 소설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좋은 구성과 매력 있는 소재를 가지고 있고, 훌륭히 써낸 소설이라 생각된다. 난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 중인 '고대 이집트 문명전'에 다녀왔는데, 꼭 내가 그 시대에 가 본 것처럼 느꼈다.

머나먼 장소와 그보다 더욱 먼 시간으로의 여행이 주는 설렘으로 한 달 동안을 즐겁게 지내게 한 소설이다. 한 권만 읽더라도 두 번째, 세 번 째 권이 기대될 만큼의 상당한 재미가 있었다. 아직 람세스를 못 읽은 사람이라면 빨리 읽어보기 바라며, 화끈하다기보다는 사람을 점점 빠져들게 한다.


<운수 좋은 날>을 읽고

中 3-3 張 君 年

난 방학 동안에 글짓기를 좀 배우려고 독서 학원을 다녔다. 다니는 중에 학원 선생님께서 한 단편소설을 내게 주시면서 한국의 유명한 소설이라고 한 번 읽어보라고 하셨다. 그 글은 현진건이라는 작가가 일제시대 때 쓴 <운수 좋은 날>이라는 단편소설이었다. 이 글은 1924년 6월 <새벽>이라는 월간지에 발표된 글이다.

내용은 열흘 째 돈 구경을 하지 못한 인력거꾼 김첨지에게 오늘은 아침부터 재수가 좋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손님을 둘씩이나 태워 80전(당시 일제시대 때 큰 돈)을 벌었다. 며칠 전부터 앓아 누운 아내에게 설렁탕도 사다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중, 1원 50전 짜리 손님을 만나 태운다. 엄청난 행운에 놀라면서도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하던 아내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이 자꾸 켕긴다. 그럼에도 그는 손님 하나를 더 흥정하여 태워다 준 길가 선술집에 들른다. 그러나 거나하게 취하여 설렁탕을 사들고 들어온 김첨지를 맞이한 것은 이미 숨이 끊어진 아내와 빈 젖꼭지를 빨고 있는 아기였다.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てててててて."하고 중얼거린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 냈다. 이 이야기는 제목 '운수 좋은 날'과는 영 뜻이 안 맞는 내용이었다. 왜 김첨지에게 운수 좋은 날과 동시에 불행이 닥쳐온 걸까? 왜 그는 잠시의 행복보다 더 깊은 고통을 겪었을까? 그 이유는 그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뜻은 그는 가난이란 단어를 못 벗어났기 때문이다. 바로 이 글은 일제시대 때의 한국 국민의 고통과 가난을 그려낸 것이다. 왜 이런 글로 그런 뜻을 나타내는 걸까? 더 자세하게 글을 썼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일제시대 때 만약 일본을 비판하는 글을 쓰면 곧바로 잡혀가기 때문에 그는 할 수 없이 이런 글로 나타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한국 민중들이 일제시대 때 얼마나 고단한 생활을 했는지 알게 됐다. 그래서 난 시대를 잘 태어났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끝으로 난 이번 겨울방학 동안에 글짓기 학원에 잘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책의 지식도 배워서 이번 겨울방학은 참 나한테 뜻깊은 겨울방학이 아니었나 한다.















<논설문>

사설 <산불 재해민 구호에 총력을-2000/4/12 문화일보>를 읽고

高 3-4 任 慶 麗

전국에서 일주일 째 계속된 대형 산불 확산으로 강원도 지역은 마치 전쟁을 생각나게 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강릉 산불로 주민 수 천 명이 대피하고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도대체 왜 미리 방지를 못 하는 것인가! 1,2주 연속된 산불로 진화가 되지 않는다면 해마다 얼마나 많은 산림을 망치는 것인지 생각해 보자.

이번 산불 진화에 대한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를 생각나게 한다. 첫 번째는 진화 장비에 대한 것인데, 대규모 군 병력을 투입하고 심지어 예비군까지도 산불 진화에 동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산불이 번져 울진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까지 위험권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산불 진화 장비를 현대화하는 것이 시급하고 한편으로 한국엔 아직도 산불 진화를 하는 전문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진화를 제대로 막지 못했으며, 헬리콥터 역시 부족한 탓에 진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째는 이 지역은 매년 봄철 건조기에 산불이 많이 나고 산의 경사가 급할뿐더러 바람도 강해서 산불이 나면 진화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체계적으로 진화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전에 준비 정신도 부족해서 금년에도 똑같은 산불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이번 산불로 불쌍한 재해민만 남았다. 또한 고통을 나누지 못할 망정 책임을 서로 밀면서 방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반성해야 한다. 아니 대책 마련이 시급할 것이다.

이번 산불은 넓은 지역에서 거칠게 타오르는 산불이라서 소방호수나 양동이로 불을 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마다 봄철 산불에 대비해 헬기를 대폭 늘리고 재해민이 생기지 않게 우리 자신들부터 조심해야 한다. 무엇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사설 <생활 주변에 만연된 마약-2000/3/23 문화일보>를 읽고

高 3-4 任 慶 麗

최근 들어 마약 사건이 급증하고 있다. 시민들의 일상 속에 스며드는 속도가 무척 빨라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마약은 한 번 빠져들면 웬만한 의지로는 치료가 어렵다고 한다. 또한 환각상태에서 저지르는 2차 범죄는 사회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22일에는 다른 사람도 아닌 30대 경찰관이 히로뽕을 상습적으로 투여한 사실이 밝혀져 우리를 실망시켰다. 이와 같이 마약이라면 유흥업소나 연예인들이 탈법으로 사용한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러나 이젠 계층이 다양해져서 회사원, 택시기사 심지어는 주부까지도 한다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수사 당국의 의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들은 국경과 법률을 넘어가면서 지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외국과의 범죄 교류는 물론 마약에 관한 범죄들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하루 빨리 해결책을 마련하고 수사를 넓혀 가면서 외국 경찰력과도 협력해서 마약을 뿌리 뽑아야 한다.

마약은 효과적인 처방도 그만큼 어렵다고 한다. 청소년들에게 마약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인식시키고 일깨우는 교육이 중요하고, 또한 청소년을 위해 마약 퇴치운동을 강력하게 벌이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사설 <'씨랜드 참사'에 다시 분노한다-2000/3. 조선일보>를 읽고

高 3-4 呂 明 美

내가 읽었던 이 사설의 내용은 1999년 6월에 일어났던 '씨랜드 참사'의 중심인물들이 법에 의해 적당한 처벌을 받지도 않았고 뉘우침도 없는 실상을 평론한 것이다. 그리고 아래의 글은 내가 사설을 읽고 느낀 것들에 대해 쓴 것이다.

작년 6월에 있었던 씨랜드 참사는 우리에게 한국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망국병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누구나 인정하지만 고치지 않고 있는 것들이다.)

먼저 한국인들은 건망증이 심한 것이다. 씨랜드 사건이 일어난 지 일 년이 채 지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모두 씨랜드에서 있었던 유치원생들의 죽음, 특히 쌍둥이 자매의 죽음은 모두 잊은 채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욕하던 입들은 사건 관련 재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 결국, 관련 공무원들의 죄는 묵인되고 말았다.

다음은 책임전가의 귀재들이란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이 터졌다 하면 관련 공무원들의 '책임 떠넘기기'가 시작된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화재 당일 공무원들은 서로 다른 부서에 책임을 떠넘길 궁리만 하였고, 아무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민 누가 보더라도 모든 공무원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책임 전가만이 이루어졌고, 대통령마저 말로만 해결방안을 찾겠다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국민들은 공무원들에게만 책임이 있다 소리쳤지만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뇌물수수를 방관하거나 공조하는 국민들 또한 공범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하자면 모두 이 사건에 대한 비판만 있을 뿐 개선은 없다는 것이다. 이 씨랜드 화재 또한 많은 신문 사설, 기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비판을 받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의 씨랜드가 될 불법 가건물들이 생기고 있으나 공무원들은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국민과 공무원 모두 화재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부모라면 지금과 같이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지 의심스럽고, 공무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아이가 당신이 불법으로 허가해 준 가건물에 단체합숙을 가겠다고 한다면 허락할 것입니까?"하고. 만약 당연히 보내지 않을 거라고 답한다면 또 "과연 당신도 양심이란 것이 있는 인간입니까?"라고 묻고 싶다.

<특집 - 문예반 토론회>

사형 제도에 대한 찬반 토론

시 간 : 2000. 4. 21(금)

장 소 : 중 1-1 교실

토론참가자 : 한글문예반(선생님까지 포함해서 12명)

찬 성 : 왕수인, 이혜정, 진실희, 하소윤(이상 高2)

반 대 : 선생님, 당매나, 왕소연, 장유진, 조금령, 초효염(이상 高2)

여서진, 유청운(이상 中1)

다 한자리에 모여 앉은 우리는 선생님께서 나누어주신 사형제도 폐지에 관한 자료를 보며,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우리가 토론하고자 하는 것을 점검한 뒤, 바로 토론에 들어가게 되었다.

반대(소연) : 우선 나부터 말할게. 내 생각은 사형이란 한 순간의 고통이 야 느낄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사람의 죄 값이 치러지는 것은 아 니라고 봐. 차라리 두고두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삶을 살게 하 는 게 낫다고 보고, 또 생명이란 고귀한 거잖아.

반대(효염) :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나, 유가족들이 용서를 한다면 꼭 같 은 방식으로 범법자를 죽일 필요가 없잖아.

찬성(실희) : 하지만 흉악범은 반성의 기미도 없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 런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거 아냐?! 차라리 사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낫다고 보는데.

반대(선생님) : 반대에는 두 가지 이유를 나눌 수 있거든.

첫째는 그 죄인들이 자신들의 벌을 반성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우리가 그 기회를 뺏지 말았으면 하는 거야. 그리고 둘째는 잘못된 판단으로 죄 없는 무고한 인명을 뺏을 수도 있는 거잖아. 한 예를 들자면 미국에 한 여인이 피살되었는데, 얼마 후 한 남자가 단지 그 여자의 시계를 갖 고 있었다는 것을 시작으로 범인으로 몰리게 됐어. 그러고 사형이 되었 는데, 후에 어떤 남자가 절도죄로 체포가 되어 집을 수색하던 중 그 전 에 죽은 여자의 귀금속류가 다량으로 발견이 됐어. 그것을 끈질기게 추 궁한 결과, 결국 이 남자가 진짜 살인범이었다는 것을 밝혀냈지.

찬성(실희) : (샘님의 두 가지 이유에 관한 항변) 첫째는 우선 사형수는

반성의 기미를 보통 보이지를 않아. 그 기회라는 것을 틈타 오히려 안 좋은 것들을 배워 나가서 더 큰 범죄를 저지르게 될 수가 있고, 두 번 째는 그런 일은 아주 작은 숫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이유로 폐지 를 하게 된다면 법의 위엄성이 떨어지고, 또한 사람들이 가장 무서운 형벌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심을 주어야 해. 설사 사 형이란 제도가 많이 이행되지는 않아도 제도로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반대(소연) : 실희 의견에 항변하는 건데, 첫째 반성의 기미가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그건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생각해. 아무리 사형수라 해 도,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반성을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소수라 해도 인명은 소중한 거잖아. 한 나라에 이런 일이 한 두 번 일어난다고 해도 전 세계적으로 본다면 그 숫자는 상당할 거잖아. 그렇게 죄 없는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간다는 것은 너무 억 울한 일이 아닐까?!

질문(수인) : 그럼 어떤 상황이 사형까지 이르는 거예요?!

선생님의 설명 : 보통 살인죄에 적용되는데, 실수로 그런 것이라면 사형 까지는 가지 않아도, 계획적으로 행해진 거라면 사형이 되지.

찬성(수인) : 그렇다면 죄를 졌으니 당연히 죄 값을 치러야 하는 거잖아 요.

반대(샘님) : 사형을 제도로라도 남겨놓자고 했는데, 그 말은 즉 범죄자 들이 중압감을 느끼도록 하자는 말인데,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가 있어. 어차피 사형 당할 거란 생각을 하니까 더 큰 범죄를 저지를 수가 있는 것이고, 이런 현상에서 과연 사형이란 제도가 범죄율을 낮추 는 효과가 있는지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은 데.

질문(수인) : 이건 좀 과장된 얘기인데, 만약 본인이∼ 피해자가 된다면, 자기 자신에게 있어 아주 소중한 가족들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살해를 당했다면 그래도 사형이란 제도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들 해?! 모두 에게 묻는 거야..

(다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인이는 선생님을 쳐다보았고 우린 선생님의 개인적인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떤 누구도 그런 상황은 상상조차 하기 싫어했다는 것

이다. 그 얘기는 토론주제와 관련이 있지만 개인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역

시 과감히 편집한다.)

찬성(실희) : 그럼 무기징역이면 모범수로 인정되어 다시 나올 수 있다 는 말인데, 그렇다면 재범이 될 확률이 있다는 거고, 피해자의 생명은 억울하게 죽어간 거지만, 가해자의 생명은 존중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봐. 그런 범죄를 저질렀으니 그 생명이 소중할 수가 없지.

찬성(혜정) : 무고한 인명을 살해했으니 죽어야 마땅하지 않아?!

반대(유진) : 그렇다면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완벽하고, 죄를 지어본 적도 없나!!

찬성(수인) : 어차피 재범방지를 위해서는 사형시키는 게 낫고, 그리고 소연이한테 물어볼 것이 있는데, 네가 말한 무기징역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서 있다 나오는 거야?! 아님 거기서 죽을 때까지 있는 거야.?!

반대(소연) : 당연히 죽을 때까지 있는 거지. 사형이란 제도로 바로 죽인 다면 죽임을 당한 사람이 억울한 거니까, 무기징역으로 그 안에서 죄책 감과 고통 속에 살다가 죽게 하는 거지. 그게 사형보다 더 큰 죄 값을 치르게 하는 방법 같은데?!

찬성(수인) : 그럼 무기징역이라도 어차피 죽는 거 차라리 사형으로 처 리하는 거랑 큰 차이 없잖아.

찬성(실희) : 유가족들에겐 그 죄인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될 수도 있어. 그것도 고통스럽지 않아?! 또 말이 무기징역이지 모범 수로 인정되면 형벌이 깎여서 50-60년 선고받는 것과 같잖아. 모범수 로 인정받으려 좀 노력하면 되니까. 그렇게 되어 다시 나와 다시 재범 을 하고. 그 동안 이런 일이 상당히 많았구. 초범보다 재범이 월등히 많았으니까. 솔직히 죄인들이 다시 나오면 할 일이 없지 않아?.

반대(소연) : 그건 교도소안에 환경이 문제가 아닐까?! 솔직히 요즘은 안 에서 조금씩 무언가를 배우고 나오잖아. 어떤 사람들은 세탁기술 같은 것을 배우고 나오니까. 열심히 살려는 마음만 있다면 충분히 살아 갈 수 있어.

찬성(혜정) : 그건 좀 무리가 따르지 않아? 하물며 1년만 감옥에 있다 나와도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들 하는데, 몇 십 년이나 살다 나온 사람 들은 오죽할까? 그리고 큰돈을 만지던 사람들이 나와서 조그만 돈을 벌며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아닐 거야, 결국 그래서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다시 누군가에게 피해주고 또 감옥신세가 되는 거구.

반대(소연) : 그렇다면 그 죄인들이 출소할 때 미리 심리검사를 받아보 는 것도 괜찮잖아. 그 사람의 심리에 정말 아직도 범법의 위험이 있는 지, 아님 정말 내면으로부터 반성의 기미가 있는. 그리고 아까부터 확 률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런 통계로 전체를 다 본다는 것은 좀 미련 한 방법이 아닐까? 솔직히 전에 그랬다고 앞으로도 그러라는 법은 없 으니까. 그 사람들이 다시 나와 잘 살지, 아님 다시 범죄를 저지를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 아냐? 단지 옛날에 그랬으니까 앞으로도 그래야 한 다면서 옛 법을 그대로 유지만 시키려고 해서는 우리가 발전할 수 없 어. 시대에 발 맞춰 법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

반대(샘님) : 솔직히 재범에 관한 것들은 우리가 많이 접할 수 있지만, 오히려 다시 맘 잡고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잖아. 반성을 하고 나와서 죄를 갚는 마음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통계란 것에 1%가 아닌 +5%나 +10%정도를 더 줘야 하지 않을까?!

찬성(혜정) : 출소 전에 정신과 의사한테 의뢰를 해 보자는 말이 나왔는 데, 솔직히 맘먹고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거구, 또 요즘 심 리 뭐 정신과 이런 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아. 경험한 사람도 있 고. 그러니 그건 좀 현실성이 없는 거 같은데.

반대(소연) : 내 말은 꼭 정신과라기 보다는 심리적인 것을 보자는 거지. 그리고 제대로 엉터리로가 아닌 방법으로 치료하는 의사들도 많아,

(이때, 갑자기 얘기가 심리치료에 관한 얘기들이 나왔다. 주제랑 관계가 없기에 가차없이 생략하겠다.)

반대(샘님) : 사형이란 것이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부분을 그냥 외면하 는 것이 아닌가 싶다. 노력의 결과보다는, 꼭 나가서 잘 살아야 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반성하게 하는, 그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않나 싶은데.

찬성(혜정) : (샘님의 의견에 항변) 그렇다면 그 죄인들은 왜 미리 노력 을 하지 않았을 까요?! 미리 자신을 제어했다면, 노력했다면 애초에 이 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잖아요.

찬성(실희) : (미리 샘님께 사과하고 하는 말을 하고) 솔직히 선생님의

의견은 좀 감상적인 것 같아요. 노력이 가능한 이 사회라면 애초에 범 죄는 없었을 거예요,

찬성(수인) : 자꾸 재범이 발생하는 것을 막으려면 사형이란 제도는 있

어야 합니다.

(끝이 날래야 날 수 없는 우리의 토론. 결국 우리는 선생님의 제의에 따라 서로의 의견을 총정리 했고, 서로 마무리 의견을 냈다.)

찬성(혜정) : 죄를 지은 사람은 그 만큼의 대가는 꼭 치러야 한다고 생 각해. 아무 일 없이 세상을 산다면 피해자에겐 견딜 수 없는 고통일 테 니까. 또한 사형이란 제도가 있어야 범죄자들의 심리에 위협을 주기 때 문에 없애서는 안되고. 결론적으로 사형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

반대(소연) : 전에 텔레비전에서 이런 것을 봤어. 전에 끔찍한 중죄를 저 지른 두 남자가 출소한 뒤에 자신들의 죄를 반성하는 의미로 등에 큰 깃발 같은 것을 메고 국토를 걸어서 횡단하는 것을. 물론 그 깃발에는 자신이 죄를 졌다는 것과 앞으로는 열심히 살 것이란 말이 있었어. 이 런 그들을 보며 사람들이 안됐다며 음료수니 마실 거니 먹을 거니 등 을 주었지만 그들은 절대 그런 것들을 받지 않았어. 그런 그들을 보면 서 그들의 모범적인 모습에 꼭 사형이란 제도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 을 느끼게 되었어. 그렇다고 죄를 진 사람들을 무조건 용서해 주자는 것은 아냐. 사형이란 제도는 없애되, 그 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하자는 거야. 그렇기에 사형이란 제도는 없어져도 된다고 생각해.

총정리(선생님) : 우리가 이런 토론에서 결코 결과를 낼 수는 없어. 하지 만 중요한 것은 이것들인 것 같다. 그 사형이란 제도는 함부로 남용해 서는 안 되겠고, 또 죄인에게는 죄 값의 벌을 치르게 하자라는 것을.

1시간 여의 열띤 토론, 우리가 비록 해답은 얻지 못했으나, 적어도 서로의 의견들에 대해 순응할 수는 있었다. 처음 한 것치고는 무거운 주제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논리적인 의견들이 많이 나와서 뿌듯하고 기분 좋았다. 앞으로도 우리 문예반이 나날이 번창할 것을 난 굳게 믿는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귀여운 후배 중1 유청운과 여서진. 잘 들어왔구. 앞으로도 좋은 추억 많이 만들 수 있도록 열심히 잘 해보자.



<특집 - 박물관 관람보고>

국립 중앙박물관을 관람하고

高 3-2

1. 고구려 문화

기원전후 철기의 사용으로 생산력이 발전되자, 읍락 사회의 계급분화가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한반도에는 작은 나라들이 형성된다. 하지만 이 작은 나라들은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한 나라들에 점차 흡수되어 갔다. 이들 가운데 고구려, 백제, 신라는 철제무기를 이용한 정복전쟁을 거치면서 강력한 왕권중심의 중앙 집권국가 단체까지 이르게 된다

고구려는 예맥족의 한 갈래로서 부여족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에 의해 세워졌다 초기에는 혼하와 압록강 종류 계곡 사이의 좁은 평야에 있던 하나의 정치집단이 정복전쟁을 통해 "고구려"로 성장한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다. 그후 서기 313년에 낙랑군을 몰아 427년 평양은 국가의 문화교류를 통하여 고유문화를 바탕으로 주변문화를 이용하여 아시아 문화의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고구려는 실용적인 문화를 창출하고 발전시켜 이를 백제와 신라에 전파하여, 삼국을 하나의 민족 문화권으로 만들었다.

고구려 문화의 국제성과 신진성 특히 고분벽화 광개토대왕비 산성은 중국 및 북방 민족과의 항쟁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대체로 산세가 험하고 벌과 큰 강을 낀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잡았다. 고구려의 성은 남아있는 성곽 외에도 순천 요동성총 약수리 벽화무덤 용강 큰 무덤 등의 성곽 그림으로 잘 알 수 있다.

남자옷

문헌 기록에 고구려에서는 신분이 높은 사람은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낮은 사람은 통이 좁은 바지를 입는다고 되어 있는데, 고분벽화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 백제 가야 등의 기본복식은 저고리와 바지이다. 이때의 저고리는 길이가 엉덩이에 이르는 긴 것으로 깃을 왼쪽으로 여민다. 고분벽화에서 보면 신분에 따라 저고리 소매의 넓이가 달라 귀족이 입은 저고리의 소매가 평민의 것보다 넓다. 저고리의 깃과 섶 도련 소매 끝에는 의복 바탕과는 다른 천을 대어 실용과 장식의 효과를 내었는데 이것을 선이라고 한다. 바지는 오늘날의 한복바지의 원형으로 형태상 거

의 차이가 없다.

고구려 등에서 저고리와 바지는 남녀의 공통 복식이었다.

저고리와 바지 위에는 두루마기를 덧입기도 하였다. 두루마기는 기본 형태와 구조는 저고리와 같으나 길이가 발목의 추위를 막기 위해 개발된 옷이니 후에 의례용으로 쓰임새가 바뀌어 귀족층이 즐겨 입는 겉옷이 되었다.

고구려의 기와

고구려의 기와는 국내성 도읍지에 중국 계통의 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는 삼국시대 기와의 대표적 무늬인 연꽃무늬 수새가 출현하다.

고구려의 전형적인 무늬수막새는 주로 적갈색으로 연꽃잎의 수가 6개와 8개가 대부분이며 끝이 날카롭게 도드라지고 무늬나 선이 굵고 강력하여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 외에 고구려에서만 보이는 반원만에 도깨비, 두꺼비, 연꽃등의 다양한 무늬가 새겨지며 도깨비는 눈과 이빨이 과장되고 날카롭게 표현되었다.

쌍영총

쌍영총은 평남 용강(龍岡)에 있는 벽화무덤으로 널길이 달린 앞방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이다. 앞방과 널방의 이음길 사이에 8모난 돌기둥 한 쌍이 있어 쌍기둥무덤으로 불린다. 천장은 모술임 천장으로 네벽 위에 3단의 평행괴돌 1단의 세모 골굄 돌을 얹은 후 1매의 천장돌로 덮였다. 널길의 동 서벽에는 수레 말 탄 무사, 남녀입상, 북 치는 인물등으로 이루어진 행렬도가 그려졌다.

앞반에 난 휘감은 청룡(靑龍)이 그려져 있고, 널반에는 동벽공양(供養)행렬, 남벽에는 주작(朱雀), 북벽에는 주인부부의 실내 생활도와 현무(玄武)를 그렸다. 천장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세 발 까마귀와 두꺼비 및 꽃, 구름 무늬들이 그려져 있고, 각방의 네 귀퉁이에는 기둥을 그려 놓아 마치 실내와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 무덤의 조성 연대는 무덤구조와 인물, 풍속도, 사신도(四神圖)등의 벽화 내용으로 보아 5세기 전반 경으로 추정된다.


태왕릉

태왕릉은 집안(集眼)에 있는 네모꼴의 돌무지무덤으로 길이는 60여m의 가변에 5-6개씩의 큰돌을 기대어 세워 놓고 7개의 단을 지어 쌓아올렸다. 각 계단의 가장자리에는 기와를 얹어 오늘날에도 주위에 무수한 기와가 흩어져 있다. 돌방은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와방무덤이고 천장은 괴천장이다.

이 무덤의 형태는 장군총(將軍塚)과 거의 비슷하나 크기는 4배가 넘으며 무너진 돌무지 사이에서 빠른 양식의 연꽃무늬 막새를 비롯한 많은 기와와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출토되었다. 돌무지무덤 가운데서 가장 발전된 형태로 4~5세기경에 축조된 왕릉으로 보인다.

태왕릉은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에서 불과 500m 이내에 위치하며 벽돌의 영문안에 태왕(太王)이라는 글이 들어 있어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사신(四神)

청룡,백호,주작,현무를 통칭하는 사신은 동서남북의 네 방향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 하늘 사방의 28별자리와 관련 있는 상상 속의 존재이다.

고구려에서 사신은 사신도 중심의 고분 벽화에서는 처음부터 독자적인 제재로 표현되나, 생활 풍속도계 고분벽화에서는 하늘 세계로 여겨지는 무덤칸 천장부의 여러 제재의 하나로 나타나서 후에는 무덤칸 안의 사실상 유일한 제재로 자리잡는다.

천장부에 나타나는 초기 단계에 사신은 모두 쌍(雙)으로 표현되며 그 형태도 몸의 각 부분 사이에 비례와 균형이 맞지 않아 어색한 감을 주며 벽화에서의 비중도 매우 낮으나 점차 벽화 내에서의 비중도 높아질 뿐 아니라 표현도 세련되고 자연스러워지며 주작 외에는 홀수로 그려진다.

후기에 이르러 청룡과 백호는 홀수로 주작은 암수의 쌍으로 현무는 뱀과 거북의 자웅합체로 그려진 것은 사신 가운데 청룡과 백호는 벽사(抗邪)의 영물로 주작과 현무는 음양조화의 신수로 여겨진 때문이다.

고구려 고분(高句麗 古墳)

고구려 무덤의 겉모습에 따라 돌무지무덤과 돌방무덤으로 나뉘는데, 대부분 강변의 낮은 대지나 산을 지고 넓은 들을 앞에 낀 언덕 위에 조성

된다.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초기부터 있었던 무덤으로 압록강과 그 지류에 무리를 지어 분포한다. 돌무지무덤은 처음 바닥에 냇돌이나 깻돌을 깔고 널을 놓은 후 다시 돌을 둥글게 덮는 정도로 간단하였으나 점차 돌을 네모지게 쌓거나 모나 깬돌을 계단모양으로 쌓아올려 위로 갈수록 좁은 피라미드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돌무지무덤은 뒤에 네모나고 계단 모양으로 발전하여 돌방무덤의 영향으로 중심부에 널길이 달린 돌방을 만들기도 한다. 이중에서는 잘 다듬은 깬 돌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은 거대한 돌무지 무덤들은 왕릉으로 추정되는데 장군총 태왕릉 천추총들이 유명하다. 돌무지무덤들은 5세기 전반 평양으로 천도(遷都)하면서 차츰 쇠퇴하여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한강유역의 고구려유적

한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한강 유역은 지리적인 요충지로서 삼국간의 항쟁이 가장 치열하였던 곳이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이후 이 지역에 많은 유적을 남겼다.

구의동(九宜洞)유적은 아차산성과 함께 대표적인 고구려의 방어시설로서 아차산의 능선과 봉우리에는 이와 비슷한 성격의 유적이 10여 개소 분포하고 있다. 이 유적은 구덩이를 이중으로 파고 그 위에 목조 건물을 지은 뒤 그 주위에 돌을 쌓아 벽을 만든 것이다. 돌벽은 지름 15m 정도의 형태로서 깬돌과 냇물을 섞어1~1.8m 의 높이로 안쪽으로 기울도록 쌓았다 집터는 지름 7m 정도로 배수구와 온돌시설 출입구를 갖추었다. 집터 내부에서는 토기류와 철제무기 및 농공구류가 출토되었는데, 무기와 농기구가 함께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군사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싸우는 둔전(屯田)적인 성격의 군사 시설로 보인다.

또한 한강 남쪽의 몽촌토성에서도 네귀단지 등의 고구려 토기가 발견되어 한때 고구려가 이곳을 차지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문화

고구려 벽화 고분은 현재 집안에 20여기,평양 근처에 30여기가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집안에 있는 벽화 고분은 상태가 양호하지 않다. 현재 우리가 보는 수렵도 등 집안 지역의 벽화들은 일제 시대 때 찍은 사진들이다. 지금 그 벽화들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집안의 고구려 고분은 1만2천여기, 그 중에서 제대로 발굴된 고분은 극소수이고 중국 당국의 의

도적인 방치로 유적은 훼손되고 있다. 벽화 고분 역시 철문으로 막아놨을 뿐이다. 관광객들이 고분에 들어가 숨을 쉴 때마다, 벽화 유적은 조금씩 훼손되어 왔기에, 뒤늦게 이런 조치를 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강서 대묘나 덕흥리 고분 등을 본다면, 보존 상태는 최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벽화의 보존을 위하여 고분 내의 사면을 유리벽으로 만들었으며, 온도 조절 장치 등 여러 가지 보존 대책을 세워 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세계 최고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현무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중국 측에 남아 있는 고구려, 발해 유적은 점점 훼손되어 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벽화 고분은 세계적인 유적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유네스코와 협력하여 보존할 수 있도록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고구려 벽화의 역사

고구려 벽화 고분(벽화를 중심으로 함)의 발전 단계는 3가지 또는 5가지 발전 단계로 나누고 있다.1)인물 풍속도-2)인물 풍속과 사신도-3)사신도 등 3가지 발전 단계로 분류하기도 하고 더 세분하여 1)인물 풍속도 고분, 2)인물 풍속 및 사신도 고분, 3)장식 무늬고분, 4)장식 무늬와 사신도 고분, 5)사신도 고분으로 분류한다.

여기에서는 3가지 단계로 보고자 한다.

전기에 해당되는 4-5세기에는 인물 풍속을 그린 단실분, 감 또는 측실의 2실분이 만들어졌는데 동수묘(안악 3호분, 북한에서는 이 묘를 미천왕릉으로 부른다), 요동성총, 평양 역전 고분, 대성리 1호 약수리 고분, 덕흥리(408)고분, 안악2호, 매산리사신총, 장천1호 들을 들 수 있다.

집안 정천 1호분 예불도(모사도)-1970년 발견- 무덤의 주인인 부부가 부처님께 예배하는 모습이 고구려 특유의 기법으로 잘 그려져 있으며, 경건하고 엄숙함이 종교화로서 최대 걸작이다.

인물 풍속도는 주인공의 집안 생활, 해, 달, 별, 장식 무늬 등이 위주로 되어 있으며 벽화내의 건물 구조로서는 기둥, 두공, 도리 등을 그려 목조 건물의 형식을 재현시키고 있다. 집안 생활에서는 가족, 측근, 시중 드는 사람과 호위 등 남녀 인물이 묘사되어 있고, 내용은 행렬, 사냥, 씨름, 전쟁, 무악 등이다. 또한 성곽, 부엌, 마굿간, 외양간과 우물 등 각종 건물도 묘사하고 있으며, 천장에 해, 달, 별 그리고 입구에는 문지기도 보인다.

5-6세기 벽화 고분은 중기로 보는데, 인물 풍속 및 사신도의 단실분 또는 측실을 갖춘 2실분이 만들어졌다. 쌍영총, 각저총, 무용총, 안악 1호,

고산리 1호 등을 들 수 있다.

인물 풍속과 사신도 고분은 인물 풍속도와 함께 사신도가 있는 고분이다. 벽화 내용은 인물 풍속도의 벽화보다 복잡하다. 즉, 인물 풍속과 청룡, 백호, 현무, 주작 등과 사신, 비천, 신선 등이 나타난다.

후기에 해당되는 6-7세기에는 사신도를 그린 단실분이 축조되었다.

강서대묘, 종묘, 호남리 사신총, 진파리 1호와 4호, 통구 사신총, 오회분 4,5호분이다. 사신도 고분은 벽화가 사신도 위주이다. 고분 내의 4벽에 사신을 그리고 천장에는 황룡 또는 연꽃을 중심에 놓고 해, 달, 별, 기린, 신선, 비천, 구름, 인동 무늬 등을 그렸다. 그 외에 장식 무늬, 인물 등을 그렸는데, 문에는 문지기도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인접 문화를 흡수하여 고구려 특유의 문화로 용해하면서 질적으로 다른 형식의 수법과 벽화 예술을 창조하였다. 그 예로서,3각 고임 천장과 돌기둥을 세우는 양식은, 일단 고구려화되자 3각과 평행을 합치기도 하고, 4,5,8각 등을 배합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단계를 거친 뒤에 강서묘와 같은 뛰어난 고분 벽화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즉, 동양적인 회화 예술을 고구려인들은 창조하였다.

2. 가야 문화

가야 토기는 일본 스에키 토기에 영향을 끼쳤다.

가야 토기에는 굴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운 회청색경질토기와 실행활용인 적갈색연질토기가 있는데 모두 신라토기의 종류와 비슷하나 세련되게 만들어져 있다 경질토기는 처음에 이전의 와질토기의 모양을 이은 둥근밑 항아리 귀달린 항아리 등의 항아리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다가 점차 부드러운 곡선미가 돋보이는 가야토기로 발전한다.

가야는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와 신라 사이의 낙동강 유역에 위치해 있던 여러 세력집단이었다. 심한 중 변한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한 가야는 때에 따라 5가야, 6가야, 혹은 가야7국, 포상8국이나 10국 등의 연맹체의 형태로 모였지만 한데 힘을 모아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532년 김해지방의 금관가야를 시작으로 신라에 하나하나 점령되다가 532년에 고령지방의 대가야를 끝으로 모두 신라에 합쳐졌다.

가야의 문화는 선사시대 이래로 신라지역과 같은 문화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신라와 거의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낙동강을

경계로 차츰 문화의 차이가 뚜렷해진다. 신라문화가 돌무지 덧널무덤과 직선적인 맵시의 토기, 그리고 화려한 금제품 등으로 대표된다면, 가야문화는 돌덧무덤과 부드러운 곡선미의 토기, 은상감제품 등으로 특징 지워진다.

가야의 문화애용은 무덤의 조사를 통해 많이 밝혀지고 있다. 고령, 김해, 하천, 부산, 창녕, 함안 등 가야지역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의 정치, 사회, 문화, 기술 등을 파악하는 자료가 된다. 뿐만 아니라 기록이 많지 않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가야의 무덤양식은 대개 나무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순서로 변천되었다. 이러한 무덤양식은 기본적으로 원삼국시대의 여러 무덤형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각 지역마다 특색 있게 발전하였다. 각 무덤에서는 토기, 관, 관장식, 장신구, 무기, 말갖춤새 등 여러 가지 유물이 출토되었다.

가야토기에는 굴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단단하게 구워낸 회청색 경질토기와 적갈색이 나는 부드러운 연질토기가 있다. 모두 신라토기와 비슷하지만, 가야토기는 전체적으로 공예적인 세련미를 풍긴다. 항아리, 굽접시, 바리, 토기 등 생활에 쓰이는 토기 외에도 껴무거리로 만든 동물, 집, 수레, 신발 등의 모양을 한 상형토기와 뿔잔과 같이 보통 그릇의 형태와 전혀 다른 이형 토기도 있다. 특히 오리모양의 토기는 가야토기의 한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가야의 토기는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고분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쓰에끼의 발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머리에 쓰는 관은 금동으로 만든 것이 대부분인데, 관테 위에는 풀꽃무양이나 나뭇가지모양의 솟은 장식을 달고 있다. 고령 지산동 32호 분에서 나온 금동관은 일본 후구이현 니혼마쓰야마고분에서 나온 은제도 금관과 형태가 비슷하여 당시 일본과 가야간에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장신구 중 귀걸이는 가는 고리귀걸이가 가야의 특징이나 일부지역에서는 굵은 고리귀걸이도 출토되고 있다.

출토되는 유물들을 살펴보면 신라나 백제에 비해 가야의 것은 순금제품이 적은데, 이것은 가야가 연맹체의 형태로 존재하여 권력과 부가 한곳에 집중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으로 풀이된다.

풍부한 철과 생산기술은 가야가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 배경 요인이었다. 가야인들은 철을 통한 교역 활동으로 교역 활동으로 경제력을 성장시

켰으며, 철제 농공기구를 농업에 이용해 생산력을 증대시키면서 다양한 무기와 말갖춤을 갖추어 세력을 키워 나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철기제작을 위한 원료로, 또 화폐로도 사용되었던 덩이쇠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소박하면서도 뛰어난 세련미를 갖춘 가야문화는 신라문화에 발전적으로 흡수되어 우리 민족문화의 한 부분을 이르게 되었으며, 일본 고대문화의 발전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대성동 고분군

경남 김해시 수로왕릉의 서북쪽에 위치한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특히 덧날무덤은 규모가 크고, 많은 양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가야문화의 우수성과 발전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덧널무덤에서는 바람개비둥기, 방추차형 석제품등의 왜계유물, 호랑이와 말 모양의 띠고리, 청동솥 등의 북방계 유물, 중국제 거울 등이 출토되어 당시의 활발한 대외 교류를 보여준다.

지산동 고분군

경북 고령 읍내 주산 남쪽의 능선상에 자리한 대가야의 대표적인 고분군이다. 주로 돌덧널무덤이며, 왕릉급의 무덤에는 딸려 묻힌 순장묘도 여럿 발견되었다. 32호 고분에서는 가야의 대표적인 금동관, 금귀걸이 등의 각종 치렛거리와 갑옷, 투구, 큰 칼 등 무기와 말갖춤새가 출토되어 발전된 가야문화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복천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낮은 산 위에 자리한 4-5세기경의 지배층의 무덤유적이다.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등 10여 기의 대형 무덤군이 조사되었다. 이 무덤들에서는 수천 점의 토기를 비롯하여 쇠로 만드는 여러 가지 무기와 생활용구, 말갖춤, 갑옷과 투구, 금동과 흙으로 빚은 말머리뿔잔 등이 출토되었다.

복천동 고분군은 다양한 무덤양식뿐 아니라 고구려계 철제 무구류와 신라계 토기, 꾸미개가 출토되어 가야와 신라 두 나라간의 교류 관계를 연구하는데 도움을 준다.


3. 신라 문화(新羅文化)

신라는 낙동강변의 경상남북도 각지에 위치하고 있던 진한 12국 중 경주지역의 사로국이 점차 주변 소국들을 정복하며 성장하여 고대 왕권국가로 발전한 나라이다.

4세기 중반 내물마립간 시기에 김씨 세습체제를 확립하여 왕실을 안정시키는 한편 차츰 주변지역에 대한 정복사업을 펼쳐 진흥왕대는 가야를 병합하고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한강유역과 함경남도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귀족계층의 청소년들로 구성된 화랑제도와 527년에 공인된 불교는 호국사상을 강조하여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신라는 마침내 676년에는 대동강과 월삼판 이남을 차지하는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경주 분지에는 4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대형의 돌무지 덧널무덤이 만들어 졌으며 이들 무덤에서는 북방 초원계 샤머니즘의 영향이 강한 금관을 비롯하여 관장식, 금, 은, 허리띠, 금 귀거리 등 화려하고 풍부한 금속공예품이 출토되며 또한 중국제 도자기 및 거울과 서역계통의 유리그릇, 금제보검 등을 통해 당시의 대외교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무덤 외에도 경주에는 왕궁지였던 월성과 불교의 공인 이후 조성된 절터인 홍륜사터, 황륜사터와 첨성대 등 신라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많이 남았다.

신라 5세기 때, 국보 제191, 192호는 "금관"과 "허리띠가" 대표적이다.

금령총

금령총은 경주시 노동동에 있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이 무덤의 허리부분에서 금방울이 출토되어 금령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구조가 처음으로 밝혀진 무덤이다.

널 안에서 촐토된 많은 껴묻거리 중에서는 금란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려 넣은 자작나무제의 관모와 금판, 유리용기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말탄사람 토기와 배모양 토기 등의 상형 토기가 출토되었다. 말탄 사람 토기는 주인과 하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 당시의 신부관례, 말하는 풍습과 말갖춤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이 무덤은 신라무덤 가운데 규모는 작지만 금관, 허리띠, 귀걸이 등 화려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금관과 허리띠의 크기가 작고 금관

에서 발끝까지의 길이가 1m 정도인 점으로 보아 어린 왕자의 무덤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금속용기

신라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금속용기는 자루솥 국자 청동합 청동항아리 등이 있다.

자루솥은 술 같은 액체를 데우는 용기로 남국에서 모두 출토될 뿐만 아니라 형태가 매우 비슷하여 당시의 활발한 문화 교류를 보여 주는 유물이다.

금관총 출토 자루솥은 용에리 형상의 주구 뚜껑의 연꽃 무늬,용이 몸체를 물고 있는 손잡이 자루 표면에 새겨진 당초문 등은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이다. 이러한 자루솥은 중국 한대 및 육조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와와 벽돌

신라에서 기와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삼국시기이다. 기록으로 모아 2,3 세기 경이며, 주로 궁성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나, 불교공인(527년) 이후 많은 사찰이 건축되면서 연꽃무늬가 장식된 수망새가 궁궐이나 사찰 건축에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신라의 십이지상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의 범위와 시간을 나타내는 12가지 동물을 형성화시킨 상이다.

말이 갖춘 13가지 명칭도

말띠 꾸미개, 말띠 드리게, 말띠 고리띠, 말갖춤, 재갈멈치, 발걸이, 땀방울, 앞가리개, 뒷가리개, 대래, 고삐, 교들개, 말지끈

신라의 무덤

신라가 고대국가로 성장하기 이전인 사로국 단계에서는 주로 널무덤과 덧널무덤이 유행하였으며 이때의 무덤에는 풍부한 철기류와 와질토기가 부장된다. 본격적인 고대국가로 성장한 4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경주분지에는 산처럼 높은 봉분을 가진 신라 특유의 돌무지 덧널무덤이 만들어진다. 돌무지 덧널무덤은 6세기 중반 후에 동방 무덤으로 변화한다.

4. 통일신라 문화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막대한 영토와 인구를 지배하기 위해, 전제 왕건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지방을 9주로 나누고 5소경을 두어 중앙귀족을 만리로 파견하는 등 지방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통일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화려한 귀족적인 불교 문화를 이룩하였다.

통일신라는 잦은 왕위쟁탈전과 지방 호족의 반란, 귀족내부의 분열, 농민의 반란 등으로 후백제의 견훤과 태봉의 궁예에 의해 영토를 잠식당하고 마침내 935년에는 고려의 왕권에 의해 병합되어 종말을 고하게 된다.

신라가 고대국가로 성장하기 이전인 사로국 단계에서는 주로 널무덤과 덧널무덤이 유행하였으며 이때의 무덤에는 풍부한 철기류와 와진토기가 6세기 전반까지 경주분지에는 산처럼 높은 봉분을 가진 신라 특유의 돌무지 덧널무덤이 만들어진다. 돌무지 덧널 무덤은 6세기 중반이후에 돌방무덤으로 변화한다.

통일신라 토기

7세기경 고구려왕 백제의 영향을 받은 굴삭동방무덤이 경주에 들어오면서 토기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굽다리 접시는 낮은 굽다리에 굵은 돕을띠가 돌아가고 네모, 마름모꼴의 작은 굽구멍이 뚫리며, 목항아리 등 다른 그릇들도 낮은 굽으로 바뀐다. 또한 지금까지 드물게 보이던 함이 이때부터 대량으로 나타나게되며, 뚜껑에 보주모양, 잔모양의 꼭지가 달리고 그릇겉면에 톱니낭무늬, 겹고리무늬 등이 새겨진다. 그러나 차츰 굽다리 접시가 없어지고 도장무늬가 유행한다.

말기에는 긴목을 가진병, 자라병들이 나타나며 도장무늬도 차츰 없어진다. 또한 불교의 영향으로 크게 성행할 뼈단지는 화장을 한 뒤 뼈를 추려 담았던 그릇으로 무늬에 변화를 통해 통일신라 토기의 변천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안압지에서는 이제까지 출토된 대부분의 껴물거리용 토기와는 달리 생활용 토기가 대량 출토되었는데 그릇의 종류도 사발, 접시, 병 등이 많고 겉면에 꽃무늬 새무늬 등의 도장무늬가 베풀어진다.

통일신라토기에서 도장무늬 유물들이 나타나는 것은 당나라 도자기 및 금속기의 영향으로 보이며 제기적 성격이 강한 고신라 토기에 비해 실용성이 강조되었다.

안압지(雁鴨池)

안압지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14년(674년) 반월성 동쪽에 건립한 동궁에 속한 연못으로 통일신라시대 왕경에서 핵심 지역의 하나로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태조를 위해 잔치를 베푼 최후의 향연장이기도 하였다.

이 연못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 크기는 동서 200미터 남부 180미터이며 총 둘레는 1km정도이다. 못에 둘레를 거칠게 다음은 돌로 성축을 쌓았으며 서쪽과 남쪽은 직선으로 북쪽과 동쪽은 굴곡지게 쌓았다. 연못 아래는 3개의 섬을 돌아서 북편의 출수구로 흘러나가는데 출수구에는 여러 개의 나무로 된 마개가 있어 연못의 물높이를 조절하였다.

이 연못은 당나라 장안성내 대명문의 궁원 배치와 백제의 조경 기술을 조화시켜 신라만의 독특한 정원으로 만든 것이다.

5.발해 문화

발해사(698-926)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중국이 비록 그들의 지방정권이라고 하더라도 문화적으로나 종족적으로나 고구려를 계승한 당당한 강국으로서 해성동국이라는 표현 이외에도 일본에 보낸 국서나 당시 주변 국가에서의 발해의 위상은 대단한 것이었다.

聖歷中(698-699)自立爲振國王遣使通于突厥其地在營州之東二千里南與新羅相接(상동)

이 기록은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웅거하여 振國(震國:발해)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동모산이 영주에서 2천리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지만, 이곳을 서울로 삼았다는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天寶末(742-756)에 ?茂(문왕)가 서울을 上京으로 옮겼는 바, 그곳은 ?國으로부터 300리 밖의 忽汗河(목단강)의 동쪽`이라는 사실에서 구국의 문제가 생긴다. 다시 말하면 동모산과 구국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어려운 과제가 남는다.

그러나 朱蒙의 경우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遂欲都焉而未?作宮室但結盧於沸流水上居之)와 같이 대조영의 임시 거처(山城)는 가능하지만 이곳에서 40 여 년을 지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라를 세운 후 몇 년이 흘렀을 때는 인근의 평지성(五女山城과 下古城, 國內城과 丸都山城과 같은)을 축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동모산성(산성)에 대한 평

지성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동모산성은 大石江(목단강지류)를 낀 야산(600m)으로 국초의 정치적 불안과 단군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임시거점이 되었다. 산중턱에 성벽을 쌓고 목단강 유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나라의 기반을 다져 갔다. 동모산은 郭化市 서남쪽 22.5km 지점의 넓은 들판에 우뚝 솟은 야산이다. 산성은 산 중턱을 시루처럼 둘러싼 퇴뫼식산성으로 남아있는 성벽은 기초너비5∼7m의 (남아 있는 성벽은 1.5∼2.5m)돌과 흙으로 다져져 전체 둘레가 2km나된 북쪽은 40m의 험한 절벽으로 오루하(대석하)에 면하고 있어 '阻婁河樹壁自固'(『신당서』권129)라는 기록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서문지를 들어서면 자연석을 이용한 옹성이 남아 있으며, 동문지쪽을 따라 가면 우선 저수지(길이 4.6m, 깊이 1m)가 있어 산성으로서의 요건을 갖추었다. 성내 중앙에는 길이가 100m(너비 30m)정도의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이 창·칼·화살 등과 開元通寶(당) 등으로 보아 고구려 말기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재도 이 일대는 牧馬場으로 활용되고 있다.

國(永勝遺蹟)

발해의 건국자들은 이 답답한 산정에 오래 머물 수가 없다. 당으로부터의 위협 이 제거되고, 기동력이 뛰어난 속말갈족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함에 따라 '天寶末 ?茂 上京 眞?國三百里 忽汗河之東'(『신당서』)에서 보듯이 목단강 대평원을 경영하려는 의도에서 평지성을 축조해야 했다. 이곳이 구국이다. 그러나 동모산에서 구국으로 옮겼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으나, 동모산이 곧 구국일 수는 없다.

종래 여러 견해가 엇갈리고 있으며, 『韓國史講座』 (고대 편 이기백·이기동, 1982, p349)에도 구국·중경·동모산을 혼동하고 있다. 더구나 일부 견해는 동화시내의 東城을 구국의 터로 생각하고 있으며 오동성과 동모산을 포함한 郭化一帶를 범칭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근자에는 동화시 江東鄕 永勝村의 「영승유적」을 구국의 터로 간주하고 있다.

여승유적은 목단강을 끼고 그 서쪽 5km 지점에 동모산이 있고, 동쪽 4km 지「육정산 고분군」이 있으며, 북방 10km 지점에 오동성이 있다. 유적지는 남북이 1000m, 동서가 700m의 크기로 장방형의 평지성터로 그 안에 5개의 건물지가 있어 上京址를 방불케 한다. 제 1 건물지(동서 30m, 남북 20m)에서는 기와·벽돌·동전(개원통보)등이 출토되었는 바 거의 발해 것들이다. 특히막새 기와는 육정산 고분군의 것과 같다. 이유를 구

국의 터로 보는 이유는 그 크기의 장엄성(오동성은 동서 400m, 남북 200m), 동모산성(산성)과의 거리(5km : 중경이나 상경과 그 형태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동모산(성산자산성)과 영승유적은 하나의 都城體制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인다. 다만, 문헌이나 유물의 출토에 따라 이곳(영승유적)을 구국이라고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는 것은 발해사의 한계라 하겠다.

중경(顯德府)

중경은 제 3 대왕 文王(대흠무:737-793) 天寶年間(742-756)의 수도였다가 천보말(755)에 上京으로 옮긴 공식적으로는 두 번째 수도였고 제 2차 수도 이전으로 서울이 된 곳이다. 그런데 이중경에 대해서는 소밀성(김육발)·돈화시(津田·池內?)·서고성(화룡) 등 이설이 분분했으나, 현재의 학계 견해는 후자로 일치하고 있다.

중경 현덕부는 화룡의 해란강 유역인 두도평야 가운데 위치하는 바, 이곳은 구국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중심지였다. 구국에서 高組(대조영)와 武王(대무예)이 어느 정도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건국과정에 따른 정치적 혼란과 민족적 갈등을 수습함에 따라, 보다 효과적인 통치책이 요구되었다.

그것은 대조영·무왕으로 이어진 武治時代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동시에 토착의 백산말갈부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해란강 유역의 경제개발은 새로운 文治時代를 뒷받침할 수 있었다. 특히 이곳은 동화일대보다 온도가 2∼4。C가 높으며, 보다 비옥하여 `盧州의 벼`, `顯州의 철`과 같은 풍부한 산물이 생산되고 있었다. 결국 중경은 협소한 구국의 한계를 극복하고 교통·군사상 요충지가 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나라의 중심지로서 전국 교통망인 5道의 교량적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서고성 부근에는 貞孝公主墓를 비롯한 발해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으며 龍海寺·高産寺 등 寺址가 모여있어 수도로서의 위상을 높여준다. 장방형의 외송은 남북이 730m, 동서가 630m로 성벽은 토축(두께 0.1m)으로 밑면은 13∼17m(현재는 1.8∼2.5m)의 높이로 되어 있으며 외벽은 연길에서 용정으로 뻗어가는 대로변과 나란히 이어지고 있다. 다만 외성의 남쪽과 동쪽끝에는 해자가 남아 있어 현재 수로도 활용되고 있으며, 남쪽 외성은 인도로 사용된다.

내성은 외성의 중부의 북쪽으로 70m정도 안에 있는 바, 크기는 남북

310m, 동서 190m정도로 현재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에 1∼5궁전지가 있는 바 크기는 36m⁓4m(1·2궁전)정도로 궁전의 모습은 찾을 길 없다. 다만, 북쪽의 외송과 내성사이의 民家와 내성 밖의 假山 및 연못의 흔적은 잃어버린 왕궁터의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다.

상경(龍泉府)

상경은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에 위치한 발해의 중심 서울로 동경성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목단강(胡汗水)이 가로지르고 그 남쪽에는 경박호(忽汗海)가 있어 풍부한 농산·어산물이 있으며, 주변에 張廣재령과 노예령 등이 감싸주는 천혜의 요충이다. 상경은 천보말(755)에 중경으로부터 천도하여 30년간 수도였다가 785년(대홍 48년, 문왕49)에 동경으로 옮긴 후, 794년(성왕 1)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발해가 망할 때까지 132년간 서울로 자리하였다. 그러므로 상경은 2창에 걸쳐 162년간 (3분의2이상)발해의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가 된다.

그러나 926년 거란의 耶津阿保機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東丹國을 세우고 이곳을 天福城으로 하고 자신의 태자인 阿律倍를 그 왕으로 삼아 지배하게 하였다. 그 후 태조(야율아보기)가 죽은 뒤 두 아들(야율배.야유덕광)간의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한 耶律德光은 수도를 동평(요양.928)으로 옮긴 후 동경성을 불살라버려 발해유적을 파괴해 버렸다. 더구나 이곳 주민을 강제 이주시켜 페허화시켰다.

문왕은 중경에서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과 문치정치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특히 말갈족에 대한 통제가 어느 정도 완성되면서 북방의 黑水??에 대한 정치, 군사적 공세가 필요하였다. 서쪽의 契丹의 세력이 강화되어 安祿山 대군을 격파하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안록산의 난(755)은 요서 지방에서 뿐 아니라 만주 일대까지 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발해의 안록산에 대한 견제는 안록산이 파견한 사신을 감금하는 독자적 행동을 나타내는 데에서 보여진다. 따라서 문왕은 보다 실질적인 만주를 지배하고 중국과 관계를 멀리하려던 정치적 의도가 엿보인다.

궁성은 왕실의 거주지로서 현무암 궁성벽으로 쌓여있는바 남북 720m, 동서 620m, 남쪽의 성벽(2.5m)은 웅장하게 남아있다. 두 개의 문으로 연결된 같은 제 1 궁전까지 직선으로 170m나 된다. 남문(午門)은 五鳳樓(청대지청)로 현무암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저기 석화흔적이 남아있다. 궁성은1-5 궁정이 중심부이다. 제 1궁전은 3m가 넘는 기단 위에 동서 55.5m, 남북 24m의 장방형으로 대궁전(金??)이 있었다. 현재는 동서 12줄, 남북

5줄로 된 둥근 모양의 현무암 주춧돌이 잡초 속에 남아 있다. 기단 위에는 여러 개로 장식된 각기 회랑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5개의 궁전은 전체 회랑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건물을 연상케 한다. 문왕은 오봉루 남쪽에 전청을 지어 정사를 총괄하였을 것이며, 그 동서쪽에 3성 6부의 중앙 관부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들 궁전과 회랑의 주춧돌은 모두 현무암을 사용하였으며, 궁전 건물은 律단층식·2층 처마식·누각식 등 다양한 형태를 보였으리라 여긴다. 지붕에는 주로 푸른 기와를 덮었고, 궁전은 북쪽으로 가면서 낮아질 듯하다.

東京(龍原府)

동경은 현재 春市 서북쪽 궁영 농장의 넓은 들판에 위치한 八連城을 뜻한다. 785년(문왕 49)에 上京에서 이곳으로 옮긴 후, 9년간 수도였다가 794년에 다시 상경으로 돌아갔다. 동경성은 현재 러시아·중국·북한의 접경지라는 사실과 같이 당시도 흑수말갈에 대응하고 동해와 면한 정치·외교상의 요지였다.

문치정치의 기반을 확립한 문왕이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 무엇보다도 소위 '魚夫之利'를 위한 해상 이득을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발해의 정치·경제적 성장이 서쪽으로 당과 거란, 남쪽으로 신라의 견제에 부딪쳤다. 결국 바다로의 진출이 필요하였으며, 대일 관계의 새로운 모색이 요구되었다. 재위 57년간 11차례의 대일교섭사를 파견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대일 외교는 동물의 가죽·인삼·꿀 등의 대일 무역품으로 등장하였으며, 일본의 비단·명주·구슬이 발해 귀족의 수요품이 된 것이다.

다음으로 훈춘 평야의 경제력에 대한 관심이다. 이곳은 비옥한 '충적평야'로 쌀이 생산되었고 '영주의 소금·책상의 된장', 그리고 다양한 생산품으로 그 경제적 중요성이 높았으며, 빈번한 일본과의 교섭으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수 있었다. 특히 元義로 대표되는 세력은 막강한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므로 문왕은 이를 제압하려고 천도를 계획했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元義는 문왕을 계승하였으나 바로 축출되었다. 끝으로 동경천도는 당시 북방경영을 추진하던 宣德王(780∼785)에 대항하여 신라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이루어졌다.

다음으로 上京一帶는 넓은 목단강 평야의 경제력을 지닌 곳이다. 경박 호화산의 용암이 江床을 덮어 온도를 조절시켜 주었으며, 그 위에 쌓인

부식토는 농사에 적절한 바탕이 되었다. 1963년 상경용천부 발굴시에 다량의 철제농구(보습)의 출토가 이를 뒷받침할 수 있으며, 경박호의 풍부한 어획물은 수도로서의 역할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더구나 용주의 명주 역시 당대 대표적인 수공업의 발달상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문왕은 785년에 다시 서울을 동경(용원부)으로 옮겼다. 그것은 신라와의 정치·군사적 대치상황과 일본과의 원활한 교섭을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 다만, 문왕 말년의 정치적 혼란으로 서울이 다시 바뀐다. 발해가 수도를 다시 옮긴 이유는 문왕(739∼793)의 장기 집권후 새로운 통치질서 확립을 위한 조치이다. 기대했던 일본관의 정치·경제적 이익도 수준 이하였으므로 서울이 나라 귀퉁이에 존재할 필요는 없었다. 문왕이 죽은 후 왕통은 元義(문왕의 族弟)로 이어졌으나, 그는 곧 국인에 의해 피살되고 成王이 등장하였으나, 그 역시 반년만에 병사한 후, 康王(승린)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적통자로서 성왕은 민심을 수렴하고 새로운 발해왕통을 확립함으로서 동경지역의 세력(윈의)을 타도하려는 조치가 필요하였다. 더구나 일본관의 외교적 이익에 한계가 다해 왔으며, 동방에 치우친 동경의 지리적 문제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1차 수도 경영과정에서 문제가 된 왕성으로서의 미비한 점이나 궁정시설을 어느 정도 보완함으로서 발해의 중심수도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왕권의 재확립과 말갈인에 대한 복속이 가능한 8세기 이후, 신라와의 정치적 대립 [공존]이 나타날 수 있었다. 띠라서 2차에 걸친 신라사신의 파견(790, 812)도 경색된 남북관계의 조정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한다.

상경성은 外城·內城·宮城 등의 3중으로 된 장방형의 평지성이다. 외성은 동서가 길고(동벽 3,358.5m, 서벽3,406m), 남북은 짧은(남벽 4,585m, 북벽 4,946m) 16,300m가 넘는다. 성벽은 속을 돌로 쌓고 곁에 흙을 씌웠으며 현재 3m정도의 높이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는 동서에 2개, 남북에 3개씩 10개의 성문이 있다. 성은 중앙대로를 중심으로 동·서로 양분되었으며, 그 안에 동서·남북의 도로에 따라 82개의 坊으로 되어있다.

내성(皇城·王城)은 외성은 중부 북쪽에 치우쳐 있는바, 동(900)·서(940)·북(1096)의 총 길이 3,986m의 장방형이다. 이 내성의 동쪽 성벽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높이는 1m정도이다. 내성 벽에는] 문이 3개 있고 남문에 정문으로 궁성남문과 외성남문(중앙)과 일직선상에 있다. 특히 동쪽 구역의 남부에는 禁(둘레 537.6m)이 있으며, 현재 호수와 두 개의 湖心島(정자)와 假山이 있어 안압지의 멋을 능가한다. 특히 남부 구역

이 중앙관청지로서 자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동경성유적지는 현재 배추밭으로 바뀌었다, 외성 크기는 동벽 746m, 서벽735m, 남벽 701m, 그리고 북벽 712m로 그 둘레가 2894m나 된다. 백양나무의 숲으로 변한 외성지는 일부 토성의 흔적이 있을 뿐 성벽으로 보이지 않는다. 외성 북편쪽으로 처진 내성은 남북 218m, 동서 318m의 크기로 잡초에 묻혀 있으나,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앙에 2m 높이의 둔덕(45m⁓30m)에 여러 개의 초석이 줄지어 있는 제 1 궁전지가 있고, 그 옆에 또 하나의 둔덕(14m⁓9m)이 있어 침전으로 생각된다.

6. 감상

우리 조는 박물관에 가서 가야문화에 대해서 공부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다 보지는 못했지만 느낀 점은 정말로 신기한 게 많았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토기와 용벽화가 제일 인상에 남았다.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만약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생긴다면 열심히 관찰할 거다.

- 王 樹 乙 -

우리 반, 3반, 4반이 같이 박물관에 간 게 처음인 것 같다. 거기서 많은 걸 보았다. 우리 조는 가야문명을 조사하기 때문에 가야에 대한 것만 봤다. 그 중에서도 그 화폐인가? 용무낭에 새겨져 있는 게 제일 눈에 띄었다. 어떻게 그 조그마한 곳에 그렇게도 정교하고 예쁘게 그렸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 칼하고 갑옷이 정말 멋있고 또 무시무시했다. 그리고 그곳 매점의 우동은 정말 일품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가고 싶다. 다른 곳에도てててててて

- 王 永 峰 -

나는 이번에 중앙국립 박물관에 가서 가야라는 역사에 대해 연구했다. 가서 많은걸 보았지만, 가야가 제일 적었다. 친구들이랑 토론 결과 역시 가야가 선택되었다. 가야에는 토기도 있고, 갑옷도 많이 있었다. 눈에 띄는 건 어느 마네킹이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 簫 祝 東 -

나는 이번에 박물관에 가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보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검하고 여러 가지 사냥 도구들이었다. 너무도 신기했다. 옛날사람들은 어떻게 돌로 사냥하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것만 봐도 알 것 같았다.

- 王 吉 運 -

국립중앙박물관을 탐방하고 나서 옛 조상들의 삶의 지혜와 많은 유물들을 엿볼 수 있었다. 박물관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조선까지의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백제 유물인 청동거울과 무령왕 때의 왕의 유품들이 참 신기했고 기억에 많이 남는다. 지금은 다 녹슬어서 빛을 잃었지만 옛날에도 거울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무령왕 때의 유물 중에선 왕의 신발인 금동 신발이 참 인상 깊었다. 신발 밑바닥에 삐쭉하고 길쭉한 철이 달려있었는데 그게 신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정말 궁금하다. 조상들의 생활 속에 쓰여진 유물들을 보고 있으면 그 시대에 유물들이 얼마나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는지도 알 수 있다. 이번 박물관 탐방으로 인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고 나중에 기회가 생긴다면 더 많은 박물관을 직접 탐방하여 조상들의 지혜를 더 많이 알고 싶다.

- 趙 美 花 -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 온 후 가장 인상 깊었던 유물은 백제시대에 왕들이 베고 자는 베개와 발받침이다.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화려하고 예쁘지만 막상 베고 자려면 딱딱하고 높이도 높고 해서 굉장히 불편했을 것 같다. 두 번째로 인상 깊었던 것은 백제의 토기이다. 백제관의 대부분의 유물이 토기여서 별로 눈에 띄진 않았지만 단순하고 소박한 모양이 오히려 더욱 백제의 토기를 돋보이게 하였다. 처음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유물들이 별로 없어서 실망했는데 하나하나 조사하면서 한나라의 역사란 유물이 전부 다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백제가 비록 세력이 약하고 오랜 역사를 갖진 못했지만 한국 역사상에서 한 시대를 책임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자료이다.

- 崔 美 艶 -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와서 나는 예전에 미쳐 몰랐던 고대의 관한 많은 사실과 구석기시대부터 조선까지의 모든 유물, 일상용품, 그 당시에

사용했었던 물건들을 볼 수 있었고, 또한 옛 선조들의 지혜와 생활 습관 등을 엿 볼 수 있어서 현장학습을 간 보람을 느꼈고, 배움에 있어서 참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 그중 우리 조는 백제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발표하기로 했다. 백제의 유물 중에서 도깨비 얼굴 장식, 금동산 모양 장식, 은제꽃모양 관장식, 금제관장식, 귀걸이, 전통적인 토기 등을 비롯한 백제의 특징 있는 여러 종류의 유품들을 관람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거의 처음 접해본 것들이라 다소 생소하긴 했지만 너무나도 서로 잘 어울려지면서 훌륭하고 값진 물건들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앞으로도 고대의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서 후세에도 길이길이 남아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했으면 좋겠다.

- 孫 詩 媛 -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보다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정비된 유물을 감상할 수 있다.우리는 백제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각자 분배된 항목을 갖고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난 부여 능산리 고분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되었고 그 당대 사람들의 관한 미세한 흔적을 볼 수 있었으므로 옛 조상들의 사상과 생활의 풍요를 예측할 수 있었다. 고분의 천장에는 동하총 천장 연꽃무늬로 마치 살아있는 인간들과 같은 취급을 하였고 그들이 생전에 쓰던 유품과 의미 있는 벽의 문양은 실로 삶에 대한 애착이 느껴졌다.

- 樊 施 恩 -

감탄의 극치, 너무 신기했다. 돌에 새긴 그림과 장식, 모두 신기할 정도로 정교하고 또 아름다웠다. 벽돌무덤은 대동강 유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초기의 벽돌무덤은 널방의 네 벽만을 벽돌로 쌓고 천장을 나무로 덮었다. 차츰 발달하여 고구려의 돌방무덤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와 같이 옛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자신이 살아가는 데에 기쁨을 찾으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런 우리의 지금 모습은 게으름 그 자체이다. 옛사람들이 해 왔던 많은 것들을 허물고 그것보다 좀더 편하게 살아 보려고 갖은 편리 도구들을 만들어 냄과 동시에 점점 세계는 종말과 가까워져간다.. 벽돌에 돼 있던 조각 분명 손으로 직접 했을 텐데 역시 옛사람들이 더 지혜로웠다고 다시 생각해 본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나도 이런 예술품 쪽에 더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고 싶다.

- 蘇 在 英 -

백제를 관람하면서 신기한 물건들을 많이 보았다. 그 중 백제고분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백제 무덤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제일 특이한 건 돌무지 같은 항아리처럼 생긴 무덤이었다. 두 개의 항아리가 합쳐져 꼭 시체를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나중에는 돌방무덤이 생겼는데, 무덤치고는 그 모습이 너무 장관이었다. 꼭 작은 공원처럼 생겼고, 무덤은 전부다 돌로 쌓여서 층계를 나누어 정교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난생 처음 보는 백제무덤을 보면서 옛 사람들이 얼마나 사후 세계를 소중히 생각했는지 또한 신기한 모양 때문에 무덤이 아닌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 특이하게 생겨서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기억이 남아있다. 그리고 지금도 부여에는 무덤이 남아 있다는데 기회가 닿으면 꼭 한번 가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

- 張 惠 林 -

내가 국립박물관에 가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야였다. 거기에 있는 물건들은 하기도 하고, 옛날 물건들을 다 거기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신기하고 좋았다. 우리 한국어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아주 좋았다. 우리들이 평소에 볼 수 없는 것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매우 좋았다. 우리도 이런 기회가 종종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王 宗 敏 -

난생 처음 박물관에 가 봤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간 박물관은 나의 설레인 마음에 찬 얼음물을 껴얹었다. 박물관이라고 해서 뭐든지 다 있을 줄 알았고 어마어마하게 클 줄만 알았다. 하지만 참혹한 현실이 나를 실망케 하였다.

지하 1층에 나의 관심을 끄는 물건이 있었다. 그것은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있는 경복궁의 예전의 모습과 조선 총독부가 세워진 모습과 주위 배경을 비교할 수 있는 모형이었다. 그 어여쁜 궁궐을 부숴 그런 흉악한 건물을 짓다니... 건물모양도 일자였다. 뒤늦게나마 경복궁을 복원한다니 다행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생활 속에서도 일본의 흔적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와루바시, 쓰메끼리, 빠께쓰, 다꽝 등등.

나라가 앞장서서 역사를 바로 잡고 경복궁을 다시 세우면 뭐하나...개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 盛 永 寬 -

국립 중앙 박물관을 난 항상 아무 생각 없이 매번 지나쳤지만, 이번 기회에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확인하였다. 생각보다 아주 낮고 건물 구조도 무척 정교하게 만들어져있었고 들어가서 보니 사소한 돌멩이 조각 하나하나도 모두 신기했다. 아쉬웠던 점은 시간이 너무 조금 밖에 없어서 모든 시설물들을 다 볼 수가 없었던 점이다. 그 점이 정말 안타까웠다. 만일 기회가 또 된다면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이번 참관으로 인하여 역사에 관한 일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어 참 좋았다.

- 趙 渡 俊 -

나는 이번에 박물관에 난생 처음으로 갔다. 아주 아주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특히 내 관심을 끌게 하는 물건은 돌로 만든 여자 알몸이었다. 난 이것을 보고 옛날 사람들도 성에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盛 積 廣 -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죽망동 원경 오키노시마 유적 고대 향로와 제사유적 이 유적들은 서해안에서 주변보다 높은 변산반도의 끝부분에 있어 일찍부터 연안을 항해 또한 조선시대에는 각종 유물들이 있고, 약 10cm 범위에 20-30cm로 쌓여 있었고 또한 삼국시대에는 토기류와 쇠창, 말두께로 쌓여있고 도끼, 거울, 손칼, 갑옷 등 여러 가지 동물과 사람의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특히나 일본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이 중국의 청자고 삼국시대에 국제교역 항해상의 길목이 되었었다. 유물로 보아서는 조선시대에도 제사를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 陳 玄 -

이번에 박물관에 가서 우리 조는 백제에 대해 조사했다. 그 중 제일 관심이 가는 것은 기와와 벽돌이다. 백제기와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제작 된 것으로 보이는 몇 개의 수막새만 남아 있어 그 모습을 확실히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백제기와 가운데 특성을 가장 잘 보여 준 것은 연꽃 무늬로 장식된 수막새다. 그리고 가장 신기해 보였던 것은 도개깨비기와였다. 왠지 멋있으면서 무섭기도 하고, 도깨비기와 하나를 만들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 같다. 지금도 그 도깨비 기와집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左 秀 娟 -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 온 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도깨비불장식이다. 화려하고 멋지고, 거의 불꽃놀이를 연상케 했다. 이것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종류의 유물들도 볼 수 있었다.

- 孫 昌 林 -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꽤 인상 깊었던 유물은 백제의 토기다. 박물관에 도착한 후 거의 토기밖에 본 것이 없어서 그 이상 생각나는 것은 없다. 그 날 나는 꽤 많은 항아리를 봤다. 이상한 모양의 항아리도 있고,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한 것도 있었다. T.V에서나 보았던 유물들을 유리 한 장 사이를 두고 봤다는 것이 참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 張 元 平 -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한 후 나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 가서 제일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백제시대 때의 토기다. 토기는 일부러 꾸긴 것 같이 색깔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렇지만 이 토기는 꾸김이 있지만 토기에 무늬가 닭발과 비슷한 모양의 무늬와 닭발 모양의 줄이 쳐져 있었다. 색깔은 아직 덜 구운 황토색이었다. 그 꾸김이 멋있었다. 그리고 백제의 석촌동 고분군의 널무덤은 뼈다귀도 있었다. 토기도 몇 개 있었지만 이 널무덤은 너무나도 특이하였다. 유골도 있고, 관도 보였다. 다음에 기회가 또 생기면 꼭 한 번 다른 박물관에도 가보고 싶다.

- 柴 愛 嬉 -

처음으로 박물관을 탐방하였다. 들어가 보니 신기한 것도 많고, 옛날 사람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많은걸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백제관에 있는 토기 중 하나로 닭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토기인데 만든 모양이 굉장히 정교하고 예뻤다. 이걸 보면서 옛날 사람들이 닭을 좋아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陳 珍 媄 -


















































































































































































<과학 이야기>

놀라운 물의 속성

한국4-H신문(2000/3/15)

불은 물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현상은 모닥불에서 볼 수 있는데, 불길 주위에 놓여 있는 바위에는 수막(水膜)이 형성된다. 수소(혹은 탄소)를 포함하고 있는 물질이 탈 때, 수소는 항상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여 물분자 H2O를 형성한다. (물 연소 때 생기는 부산물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이런 방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물의 양은 적다.)

물은 독특한 물질이다.

H2O는 다른 어떤 분자와도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수소와 산소는 공기중에 떠 있는 매우 가벼운 기체이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도 역시 공기보다 가볍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H2O는 상온에서 기체가 아니라 액체이다. 핵물리학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러한 물의 신비가 풀리기 시작했다.

물리학자들은 두 개의 수소 원자와 한 개의 산소 원자가 결합할 때 생성되는 분자의 모양은 장난감 곰의 머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산소가 그 머리 부분에 해당되고 두 개의 수소는 귀에 해당된다. 여기에서 수소 원자는 양전하를, 산소원자는 음전하를 띤다. 원자의 상호 관계 (화학결합) 때문에 물분자의 상단, 즉 두부(頭部)는 양전하를 띠게 되고, 하단 즉 턱 부분은 음전하를 띤다.

따라서 H2O 분자는 작은 막대 자석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반대 전하는 서로 끌어 당기므로 양전하를 띤 귀 부분은 다른 물 분자의 음전하를 띤 턱 부분과 쉽게 연결되어 물 분자의 고리를 형성한다.

40개의 H2O분자가 연결고리 물은 실제로는 H2O가 아니라 H2O- H2O-H2O-H2O-....와 같은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고리의 길이는 많은 요인들에 의해 좌우되지만, 가장 일반적인 조건 아래서는 약 40개의 H2O분자가 연결되어 고리를 이루고 있다.

물분자에 관한 초기의 이론에서는 수소 원자가 산소와 대칭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두 귀는 머리의 정반대쪽에 달려 있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렇지만 귀의 위치(화학결합의 위치)가 확실히 밝혀짐으로써 비로소 물의 신비한 행동을 설명할 수 있게끔 되었다.

예를 들어, 다른 물질들은 거의 모두가 기온이 내려가면 수축하는데, 물은 얼기 시작할 때 까지는 수축하지만 그 후에는 팽창한다. 이러한 현상은 냉장고 안의 각얼음이 위로 둥글게 올라와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다. 물이 얼 때 H2O의 고리는 빽빽이 결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은 액체 상태일 때보다 고체(얼음)상태일 때 밀도가 작아진다. 이것은 다른 물질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성질이다.

물이 가진 또 하나의 흥미로운 속성은 표면에 강한 막을 형성하는 힘(표면장력)이다. 어떤 종류의 수생곤충은 물위를 걷거나 수표면 아래에 붙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이러한 물의 속성 때문이다. 또한, 나뭇잎에 매달려 있거나 떨어지는 물방울의 모양이 둥근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물은 습기를 만드는 성질이 있다. 이것은 액체 분자가 고체 분자에 흡착되어 일어나는 현상이다. 물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컵의 내벽에 밀착되어 있는 물의 가장자리가 약간 올라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컵 속의 산소가 물속의 수소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승현상은 물의 중량이 컵의 흡착력과 평행을 이룰 때 정지한다. 모든 물질은 물 속의 수소를 끌어당긴다. 그래서 거의 모든 것이 물에 용해된다. 우리가 보는 풍경과 지형을 이루는데 주된 역할을 하는 것은 물이며, 식물과 동물의 생명을 지탱하는 것도 물이다.

만일 물의 신비한 작용이 없다면 지구상에 생명은 없었을 것이다.

물의 작용을 알아보려면

물의 가장 흥미로운 성질의 하나는 그 힘이다. 물은 때에 따라 물보다 무겁고 밀도가 큰 물체조차 지탱할 수가 있다.

화장지를 조그만 사각형으로 잘라 그 위에 바늘이나 면도날을 올려놓고 그것을 용기에 든 물위에 가만히 띄워보자. 화장지는 서서히 가라앉고 바늘이나 면도날은 수면에 떠 있을 것이다. 이것은 표면장력이 물위에 막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물에 설거지용 세제와 같은 습윤제를 한 방울 떨어뜨려 보자. 그러면 표면장력은 현저하게 저하되고 바늘이나 면도날은 가라앉을 것이다.

유리컵 속의 물에 투명한 빨대를 넣어 보자. 빨대를 자세히 보면 빨대 속의 물이 약간 높이 상승하고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이와 같이 물이 가는 대롱 속을 상승하는 성질을 모세관현상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각설탕을 찻숟가락 위에 놓고 커피나 홍차 또는 색깔 있는 물 속에 가만히 담가보자. 액체가 설탕에 닿는 순간 찻숟가락을 그 위치에 고정시키고 액체가 각설탕 속으로 스며 오르는 모습을 관찰해 보자.

액체는 빨대의 경우 보다 더 높이 올라간다. 설탕입자 사이의 틈새가 대롱보다 작기 때문이다. 수목 속에서는 이 모세혈관 때문에 물이 100m이상이나 올라갈 수가 있다고 한다. 모세혈관현상은 표면장력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의 하나이다.

<역사 이야기>

민속놀이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한국4-H신문(2000/01/15)

◆자치기

봄, 가을에 동네 골목에서 사내아이들이 하던 놀이로 야영활동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

1. 새끼 막대기 (길이 15cm, 지름 2cm정도)와 어미 막대기(길이 40cm, 지름 5cm 정도)를 준비하고, 땅바닥에 길이 20cm, 중앙 부분이 너비 5cm정도 되게 배 모양의 구멍을 파 놓는다.

2. 참가자들은 두 편으로 나누어 공격 편은 차례를 정해 치고, 수비는 치는 자를 받는 대형을 취한다.

3. 새끼 막대기를 구멍 앞쪽에 비스듬히 걸쳐놓고, 어미 막대기로 끝을 쳐서 튀어 오르는 것을 때려서 멀리 가게 한다.

4. 떠오른 막대기를 쳐내지 못하거나, 날려보낸 막대기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수비측이 받으면 그 사람은 죽고, 그 다음 사람이 나와 계속한다. 못 받으면 떨어진 곳 근처에 있는 수비측의 한 사람이 떨어진 곳에서 새끼 막대기를 주워 구멍 있는 쪽으로 던진다.

5. 구멍 있는 곳에서 새끼 막대기가 떨어져 있는 지점까지의 거리를 어미 막대자로 재어서 몇 자인가에 따라 점수를 계산하고, 이 놀이를 다시 반복한다. 그러나, 구멍에서 어미 막대자로 재어서 2자 미만이 되면 다음 사람에게 교대한다.

6. 실격이 된 사람이 세 사람이 되면 공격과 수비를 교대하여 가며 게임을 계속한다. 미리 정해둔 점수를 먼저 얻은 팀이 승리하게 된다.

※날아오는 나무 막대기를 무리하게 받으려다 몸에 상처를 입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제기 차기

구멍 뚫린 돈을 종이로 싸서 발로 차는 민속놀이로 개칙구, 민제기, 쌍발제기 등이 있다.


1. 개칙구

한 발을 땅바닥에 고정시키고 다른 발 안쪽 옆면으로 제기를 차올린다. 이때 재기차는 발은 공중에서만 올렸다 하며 땅바닥에 닿지 않게 한다.

2. 민제기

개칙구와 같으나, 차는 발을 땅바닥에 댔다 올리며 차는 것이 다르다.

3. 쌍발제기.

두 발을 번갈아 가며 제기를 차올린다. 이밖에 발등을 이용하여 제기를 차기도 한다.

※제기 차기에서 진 편은 이긴 편에게 이른 바 종을 들인다. 즉 이긴 사람 앞의 적당한 거리에서 진 사람이 제기를 이긴 사람에게 던져준다. 헛발질을 하거나 차낸 제기를 종 들이는 편이 받아내면 "종 들이기"가 끝난다.

◆투호(投壺)

화살을 던져 병 속에 넣어 이기고 지는 것을 겨루는 민속 놀이로, 원래 고대 중국에서 하던 것이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용재총화>의 기록에 의하면, 조정에서 정월 첫 사일(巳日)과 9월 9일의 중양절에 노인들을 예우하는 기로연(耆老宴)을 베풀고 여흥으로 투호를 하였다고 한다.

1. 적당한 인원으로 편을 갈라서 실시한다.

2. 병에서 4-5m정도 거리에 줄을 긋고 떨어져 서서 화살을 병 속에 던져 넣는다.

3. 각 편에 화살을 똑같이 나누어주고, 던져서 많이 넣는 편이 이긴다.

◆연날리기

삼국 시대에 전장에서 통신 연락으로 사용하던 연이 경기 이북에서는 가을추수 이후, 경기 이남에서는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사이에 민족 놀이로 정착되었다.

"액막이 연"은 정월 열 나흗날에 연에다 '액(厄)', '송액(送厄)', '송액영

복(送厄迎福)' 따위의 글을 써서 멀리 날려보내는 풍습도 있다.

1. 연을 날릴 때의 몸은 연과 날리는 사람의 앞가슴이 45도 각도로 맞보고 있어야 한다. 연실 역시 직선에 가깝도록 팽팽하게 되어 있어야 연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다.

2. 얼레질을 잘 해야 한다. 즉, 바람의 흐름과 풍압에 맞춰 연실을 풀어

주거나 감을 줄 알아야 한다.

3. 튀김을 잘 주어야 한다. 튀김이란 얼레를 젖혀 연을 조종하는 기술이다.

4. 왼쪽, 오른쪽 보내기-연이 곧 바로 섰을 때, 통줄을 주면 연은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다.

5. 아래, 위로 보내기-통줄을 주어 연이 비스듬하게 될 때, 튀김을 주면 연은 거꾸로 방향을 바꾼다. 이 때, 얼레를 감으면 연은 수직으로 곤두박질한다. 곤두박질하는 연을 다시 잡고 위로 올릴 때는 튀김을 주어 연실을 풀어주고 감으면 된다.

6. 이 밖에도 높이 띄우고, 재주 부리기 , 끊어 먹기(연싸움) 등이 있다.

◆씨름

1. 씨름에는 왼씨름, 오른씨름, 띠씨름의 세 가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왼씨름' 하나로 통일되었다.

2. 두 사람이 마주 꿇어앉아서 서로 상대방의 허리와 다리를 걸어 잡고 있다가, 심판의 구령에 따라 일시에 일어나 서로 잡은 채로 다투는 것인데, 먼저 넘어지거나 손 또는 무릎이 땅에 닿으면 진다.

3. 씨름 기술에는 배지기, 등지기, 낚시걸이, 무릎치기, 꼭두잡이, 허리꺾기 등이 있다.

4. 이 씨름은 진취적 기상을 기르고 굳센 몸을 만들게 되므로 굳센 몸을 만들게 되므로, 오늘날 가장 인기있는 민속 운동의 하나이다.



<세상 이야기>

알아두면 편리한 외국인 상식

서대문구 민원봉사과(Tel:330-1421)

◇외국인 체류지 변경신고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외국인등록을 한 외국인이 체류지를 변경한 때 에는 전입한 날로부터 14일 이내에 새로운 체류지의 시,군,구에 전입신 고를 하셔야 합니다.

⸁필요한 서류

외국인 등록증,

운전면허증, 자동차등록증(가지고 있는 사람만)

⸂수수료 : 없음

⸃전입자 중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전입신고일로부터 15일 이 내에 자동차등록증을 소지하고, 체류지 관할 시,군,구의 교통행정과에 서 주소변경신고를 하셔야 합니다. 신고하지 않으면 과태료가 부과되 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세입자의 확정일자 신청은 관할 등기소에서 신청합니다.

(필요한 서류 : 계약서, 외국인 등록증)

⸅취급부서 : 시,군,구의 민원봉사과

◇외국인 인감증명서 발급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외국인등록을 한 외국인은 체류지 관할 시,군,구 에서 인감신고를 하신 뒤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감신고

- 신고자 : 본인이 직접 신고함을 원칙으로 합니다.

- 필요한 서류 : 외국인 등록증, 인감도장, 사진 1장

- 수수료 : 수입증지 300원(1통 기준)

⸂인감증명서 발급

- 필요한 서류

*위임하는 사람 : 외국인 등록증, 인감도장

*위임받은 사람 : 외국인 등록증(신분증)

- 수수료 : 수입증지 300원(1통 기준)

⸃취급부서 : 시,군,구의 민원봉사과

◇외국인 등록 및 출생, 사망 신고

- 취급부서 :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Tel:650-6224/9)

◇외국인 등록 사실증명 및 출입국에 관한 사실증명서 발급

⸁발급처

- 출입국관리사무소 출장소, 분소

*김포출입국관리사무소 도심공항분소(Tel:651-6922/3)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세종로분소(Tel:732-6214/6)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Tel:650-6224/5)

- 시,군,구의 민원봉사과, 동사무소

⸂수수료

- 출입국관리사무소 : 수입인지 1,000원(1통 기준)

- 시,군,구 : 수입인지 1,500원(1통 기준)

⸃신청인 : 본인, 가족, 고용주, 위임장을 가진 사람

◇자동차 등록

- 취급부서 : 서대문구 교통행정과(Tel:330-1444,1484)

◇세무

- 취급부서

*국세 : 서대문구 세무서(Tel:287-4200)

*지방세 : 서대문구 세무과(Tel:330-1345/54)

◇의료보험 및 국민연금가입신청

- 취급부서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 서대문은평지사(Tel:323-8932)

*국민연금관리공단 서대문은평지사(Tel:383-4903/5)





편집자의 변

수업 시간에 꾸준히 해 온 작문이 조금씩 그 결실을 맺고 있는 것 같아 좋습니다. 내용이나 맞춤법이나 모두 나아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번 호에도 지난번에 이어 高3 학생들의 박물관 보고서를 특집으로 실었습니다. 학생들의 느낌이며, 특히 직접 그린 유물 그림들을 통해 학생들의 열정을 볼 수 있어 기쁩니다. 덧붙여 이런 열정들이 자주 표현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끝으로 원고를 모으고 편집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선생님들과 문예반, 그리고 삽화를 그려 준 王立賢 학생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올림







한글 마당 13

發 行 者 : 韓國漢城華僑中學 韓語韓文敎學硏究會

總 編 輯 : 權相基

編 輯 者 : 한글문예반

揷 畵 : 王立賢

發行號數 : 89-1(通卷 第 13 號)

聯 絡 處 : 서울 西大門區 延禧 3 洞 89 - 1

印 刷 者 : 華星文化社

發 行 日 : 中華民國 89年 5月